[사할린동포의 오늘 ④]舊蘇시절 『얼어붙은 망향』

  • 입력 1998년 4월 20일 19시 52분


세상이 바뀌었지만 10년전만 해도 사할린의 한인들은 “고향에 가고 싶다”는 말을 입밖에 조차 내지 못했다. 그럴 자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국가보안위원회(KGB)의 감시의 눈길은 언제나 조선, 특히 남조선에 연고가 있는 한인들을 노리고 있었다.

취재진은 이번 사할린 방문을 통해 10년전 홋카이도(北海道)신문 기자들이 만났던 한인들 중 일부가 고향에 대한 그들의 마음을 솔직히 털어놓지 못했음을 알게 됐다. 가혹한 냉전의 틈새 속에서 그들은 수구초심(首丘初心)마저도 가슴 깊은 곳에 묻어놓고 살아야 했던 것이다.

홋카이도신문의 이토(伊藤)기자가 10년전에 만났던 최창수(崔昌洙·75)씨를 다시 만났다. 최씨는 당시 이토기자에게 “이제 와서 고향에 돌아가 보았자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할린에서 계속 살겠다”고 말했던 장본인.

최씨는 충북 진천 출신. 해방직전인 1944년 가을, 그는 6개월만 살아볼 요량이었던 부모와 함께 사할린에 왔다가 그만 발이 묶이고 말았다. 아버지는 늘 “곧 돌아간다, 돌아가고 말고”했는데 해방을 맞았고 조국은 영원히 돌아갈 수 없는 땅이 되고 말았다. 이토기자는 최씨로부터 사과아닌 사과를 받아야 했다.

“그땐 미안했습니다. 그러나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이토기자가 나를 만나러온다니까 구 소련 특무가 나를 찾아와 조사했습니다. 내가 사할린의 한인들 중 귀국염원을 담은 편지를 한국의 KBS에 제일 많이 보냈기 때문이었지요. 사실 나는 해방 직후부터 오늘날까지 줄곧 한국에 돌아가고 싶어했어요. 어떤 때는 일본을 통해 KBS에 몰래 보내는 편지가 종이 소리 때문에 검색과정에서 걸릴까봐 흰 호청에 사연을 적어 숨겨 보낸 일도 있습니다. 이토기자에게는 미안하지만 그 땐 그렇게 해야만 했습니다.”

최씨의 눈가에 이슬이 고였다.

“이제라도 내가 태어난 땅에 가서 죽고 싶습니다. 누구는 자식을 놓아두고 어떻게 가느냐고 하지만 자식도 어렸을 때 자식이지 언젠가는 이별할 사이입니다. 자식 없이 임종하는 게 마음에 걸리지만 그래도 돌아갈 겁니다. 아이들도 그러라고 해요. 자기들이 한국에 왔다갔다 하면 된다며….”

우리는 한국산 가전제품을 고루 갖춘 최씨의 살림살이를 둘러보았다. 여느 한인 가정 보다도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었다. 우리가 물었다. 한국에 돌아가면 생계 유지, 새로운 사회에의 적응 등으로 어려움이 많을텐데 그래도 괜찮겠느냐고.

“내가 살면 얼마나 더 산다고…. 조국이 두동강나고 산천도 변하고 인심도 각박해졌다고 하지만 고향보다 더 좋은 곳이 있겠어요. 여생이나마 조국에서 보내고 싶을 뿐입니다.”

우리는 최씨의 서재 벽면에 걸린 대형태극기와 한국지도, 도로교통망 안내도를 보며 그의 간절한 심정을 헤아릴 수 있었다.

노보알렉산드로프스크 마을에 사는 이창희(李昌熙·75)씨는 41년 강제모집으로 사할린에 왔다. 그 역시 10년전 이토기자가 찾아왔을 때 고향을 잊은 지 오래라고 했던 한인들 중의 한 사람. 그는 “생이별한 형제들을 만나고 싶은 생각은 있지만 그게 가능한지 모르겠다. 나는 이대로 살고 싶다. 이제 와서 고향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며 이토에게 화까지 냈었다.

대구출신이었지만 당시 북한국적을 갖고 있던 이씨는 “내 조국은 북조선이고 고향에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했었다. 그러나 그는 그후 국적을 러시아로 바꾸었고 91년 이후 한국을 네 차례나 다녀왔다. 그런 변화 때문이었을까. 이씨는 한결 여유있고 넉넉한 태도로 우리들을 맞았다.

“10년 전에는 긴장한 상태에서 (이토와) 인터뷰를 했습니다. 일본기자들은 내 심정을 모른다고 생각했고 내가 말을 잘못하면 어떻게 하나 하고 걱정도 했습니다. 혹시 말 실수라도 하면 나는 물론이고 아이들한테도 영향이 있을 것 같았고. 지금이야 생각하는 대로 말할 수 있지만….”

이씨는 자신이 북한국적을 택했던 것은 행여 조국으로 돌아갈 길이 빨리 열릴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었다고 설명했다. 분단이 되기 전 조국을 떠난 그에겐 남이나 북이나 다 같은 조국이라는 생각도 있었다.

실제로 그는 85년 관광차 북한을 방문했을 때 “조선사람들이 더 이상 일본인들의 지시를 받지 않게 된 광경을 보고 새삼스레 감개무량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그후 한국도 방문, 한국이 북한 보다 더 발전한 것을 알게 됐고 요즘엔 한국으로의 영주귀국도 신중히 고려중이다.

“자식들과 헤어지면 다시 이산가족이 돼 마음이 아프지만 자식과 함께 갈 수만 있다면 한국에 돌아가고 싶습니다. 고향에 가고 싶지 않다니 말이나 될 소리입니까. 고향에 가면 잘살고 못사는 것은 중요하지가 않아요.”

최씨와 이씨는 10년 전에 본심을 밝힐 수 없었던 것은 당시 통역을 맡았던 성점모(成点模·68)씨를 경계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성씨는 조선어 신문인 ‘레닌의 길로’의 부사장 및 부주필이자 공산당원으로 구 소련당국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던 인물. 우리들은 자초지종을 알고 싶어 3월2일 유주노사할린스크의 NHK지국을 방문, 그곳에서 일하는 성씨를 만났다.

그는 구소련의 붕괴로 91년 당기관지였던 ‘레닌의 길로’가 폐간되자 신문의 제호를 ‘새 고려신문’으로 바꿔 운영하다 94년 퇴직한 뒤 95년 12월부터 NHK직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더 이상 공산당원이 아닌 성씨는 10년전 상황을 사실대로 알려줬다.

“그때는 KGB시절이어서 사람들이 마음 속에 있는 얘기를 다 할 수 없었을 겁니다. 민주화가 완전하지 못해 그 사람들이 KGB의 눈치를 살핀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최창수씨만 해도 고향에 가고 싶지 않다고 거짓말을 하는 것을 저는 알고 있었지요. 그때는 고향에 가고 싶다고 하면 KGB에 밉보였거든요. 제가 통역을 맡았던 것은 KGB가 나를 신뢰할 만하다고 생각하고 통역으로 지정했기 때문이었지요.”

그의 회고는 이어졌다.

“KGB는 일본기자들이 사할린에 오면 누구를 만나 무엇을 취재하는지를 알고 싶어했습니다. KGB가 물어보면 누구든 사실대로 말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다만 당시 최씨나 이씨는 인터뷰내용에 특별한 게 없어서 별 문제는 없었습니다. 두 분들에 대해서 저 역시 특별한 감정이 없었고요.”

성씨는 사할린에서 태어난 한인2세. “출세를 위해 공산당에 입당했었다”고 털어놓은 그는 살아오면서 소련체제에만 충성했을뿐 남과 북 어느 쪽도 조국으로 생각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더욱이 한국에 대해선 88년 서울올림픽 때 소련팀의 통역으로 서울을 찾기 전까지는 ‘헐벗고 굶주린, 망해가는 나라’로만 인식했었다고 말했다.

“서울에 도착해서 이곳이 한국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겉보기엔 일본과 다를 바 없었어요. 한국에 관한 소련정부의 소개 책자들이 모두 거짓이었음을 깨닫고 정말 당황했습니다.”

성씨는 그후 경북 고령에 있는 조부모의 묘소를 성묘했고 일가 친척들도 만났다. 요즘 그는 뒤늦게 나마 조국을 되찾은데 대해 고마운 마음으로 살고 있다고 말했다.

〈사할린〓한기흥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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