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박영준/몸집과 생존력

  • 입력 1998년 4월 15일 19시 45분


지구상에 생존할 수 있는 생물의 크기에는 한계가 있다.

미국에서 발간된 고교 물리책에서는 간단한 아이디어로 최소 크기와 최대 크기에 대한 계산법을 소개하고 있다. 즉 생물은 표면을 통해 에너지를 발산하고 이 에너지 저장을 위해 적정한 부피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 덩치만 키운 재벌 쓴맛

생물의 크기가 줄어들어 표면적에 비해 체적이 너무 작아지게 되면 자기 스스로 저장할 수 있는 에너지량보다 발산하는 양이 많아지게 되므로 이 생물은 생존할 수 없게 된다. 거꾸로 너무 커지면 발산에 필요한 양보다 더 큰 에너지를 저장하게 되므로 또한 생존에 적합하지 않게 된다.

이러한 법칙을 사회 각 부문에 적용시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 보자. 사회 각 부문에도 생존하기 위해 적합한 크기 제한이 있지 않을까. 우리가 맞고 있는 국제통화기금(IMF)시대의 어려움이 사회 각 부문의 규모가 생존에 부적절했기 때문에 생긴 것은 아닐까. 그리고 이 제한의 척도는 무엇이 되어야 할까.

이 해답을 미국 인텔사의 사장인 그로브의 저서 ‘오직 편집광만이 생존한다’에서 발견할 수 있다. 회사를 경영해보면 계속 생존 여부를 판가름하는 중요한 시기가 존재하는데 이를 변곡점이라고 한다. 이 변곡점을 간파하고 변신을 하면 계속 발전할 수 있고 이를 놓치면 쇠퇴한다는 것이다.

인텔사의 변곡점은 80년대 초에 있었으며 반도체 메모리사업을 포기하고 마이크로 프로세서를 주력 제품으로 바꿈으로써 계속 성장해 현재와 같이 PC시장을 지배하는 회사를 만들 수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당시 변곡점은 매섭게 추격하는 일본 반도체 회사가 가져다준 것이다. 반면에 이러한 변곡점을 읽지 못하고 쇠퇴의 쓴 맛을 본 예는 얼마든지 많이 들 수 있다.

이와 같이 생존과 번영에 적합한 규모는 바로 이 변곡점에서 변신할 수 있는 능력의 유무에 의해 결정돼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나라의 현재 위기는 바로 사회 각 부문의 규모가 생존하기에 적합하지 않도록 과도하게 크다는 데서 이유를 발견할 수 있다. 자주 도마위에 오르는 재벌 회사를 예로 들어보자. 투명하지 못한 경영, 오너 위주의 변칙 운영, 자회사 상호 출자에 의한 금융 왜곡 등이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그러나 과거 이러한 재벌 회사 규모와 오너의 강력한 리더십에 의해 세계 3위의 반도체, 5위의 자동차, 그리고 2위의 조선 공업을 이룩하지 않았는가.

세계가 한국 반도체의 약진을 재벌 회사의 힘 때문이라면서 부러워한 적이 있다. 문제는 이러한 우리의 강점이 오히려 발목을 잡는 환경 변화를 알지 못했으며 변신해야 하는 시기를 놓쳤다는 데 있다. 사실은 놓쳤다기 보다는 이 변곡점을 알고도 새롭게 변화할 능력을 가지기에 너무 큰 규모를 유지했다고 할 수 있다.

정부 산하기관 또한 마찬가지다. 구조 조정이라는 명분 아래 부처를 줄이고 사람을 줄이는 것만으로 적정한 규모를 만들 수 있을까. 오히려 규모를 과도하게 작게 만들어 발산에 필요한 에너지를 저장하지 못해 쇠퇴할 우려도 있다. 적정한 규모는 구성원간에 정보 교환이 원활하도록 표준이 있는 체제, 구성원이 환경 변화를 쉽게 느끼고 자율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체제, 의사 결정 과정이 투명하고 결과에 대한 공정한 평가가 이루어지는 체제를 만드는 데서 구현할 수 있다.

▼ 규모 알맞아야 환경적응

조직을 부문별로 나누고 부문의 활동이 타 부문에 쉽게 전달될 수 있도록 개방하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부피를 줄이지 않고도 표면적을 크게 할 수 있다. 그동안 우리는 너무 몸집 부풀리기에 집착해 왔다. 그리고 과거 우리의 강점이었던 관행에 안주해왔다. 이제 모두 진지하게 생각할 때다. 각자 속해 있는 부문에서 생존과 번영을 위한 규모를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말이다.

박영준(서울대교수·전기공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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