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돋보기답사]경주 대왕암,신비에 잠긴 나라사랑

  • 입력 1998년 3월 31일 08시 36분


“내 죽으면 바다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고자 하니 화장(火葬)하여 동해 바다에 장사 지내라.” 삼국을 통일한 신라 문무왕이 681년 숨을 거두면서 남긴 유언이다. 그 문무왕의 수중릉으로 알려진 경북 경주시 감포 앞바다의 대왕암(사적 158호).

이 대왕암은 정말 문무왕의 무덤일까. 그렇지 않다면 대왕암의 실체는 무엇인가.

문무왕의 수장(水葬) 이야기는 ‘삼국유사’‘삼국사기’에 처음 나온다.

아들 신문왕이 아버지 문무왕의 뜻을 기려 동해의 큰 바위에 장사 지냈다는 내용. 이같은 기록으로 미루어 대왕암이 문무왕을 장사 지낸 곳이라는 사실엔 별다른 이견이 없다.

문제는 직접 시신을 묻은 무덤인가 아닌가 하는 점. 문무왕은 죽고 나서 화장을 했다. 그러니 대왕암이 그의 시신을 묻은 무덤일 수는 없다. 화장한 유골을 뿌렸거나 유골함을 묻은 곳이 바로 대왕암이다.

대왕암은 여러 개의 바위로 이뤄져있고 가운데는 빈 공간으로 되어 있다. 바위에 둘러싸인 그 공간은 시신이나 유골함을 안치하기에 적당해 보인다.

특히 관심을 끄는 것은 그곳에 놓여있는 넓적한 돌(3.7×2.6m). 무덤 석실(石室)의 뚜껑이거나 유골함을 누르고 있는 돌일 것이란 추정을 가능케 해준다.

그러나 본격적인 발굴 작업이 한차례도 없었기에 그 돌의 실체는 아직도 베일에 쌓여 있다. 그 돌 밑에 과연 문무왕의 흔적이 남아 있을지.

1967년 한 언론사와 조사단은 대왕암 발굴 결과, 문무왕의 수중릉임을 확인했다고 발표한 바 있다. 그리고 당시 박정희대통령의 지시로 경주 지역의 한 공무원이 비밀리에 석실을 열어 원효가 지은 ‘원효결서’를 꺼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하지만 발굴하지도 않은 채 발표한 것이었고 석실을 열고 원효결서를 꺼냈다는 주장도 믿기 어렵다.

최근엔 울산 방어진 앞바다에 있는 대왕암이 바로 문무왕의 수중릉이란 주장도 나오고 있다. 이 주장 역시 근거가 미약하다.

그러면 대왕암이 문무왕의 장사를 지낸 곳이 확실한데도 고고학자들은 왜 수중 발굴을 하지 않았을까.

물론 시도는 있었다. 82년 문화재관리국은 문제의 넓적한 돌을 조사하기로 했었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수중 다이버가 바다 밑으로 뛰어 들기 직전, 발굴단은 조사를 갑자기 포기했다. 왜 그랬을까.

당시 발굴에 참여했던 고고학자 조유전 국립민속박물관장의 설명. “비록 진위 논란이 재연될지라도 하나의 금기로 그냥 놔두는 것이 좋을 거란 생각이었다. 어느 정도의 비밀이 있어야 신비스러움이 유지되고 그래야만 대왕암의 의미가 계속 이어지는 것이 아닐까. 중요한 것은 진위 여부가 아니라 대왕암에 서려있는 문무왕의 나라 사랑 정신이기 때문이다. 조사를 중단한 것에 대해 지금도 후회는 없다.”

〈이광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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