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재벌이 살려면 스스로 개혁해야

  • 입력 1998년 2월 18일 21시 10분


김대중(金大中)차기대통령의 재벌개혁 요구수위가 높다. 50∼60개씩 문어발식 기업확장을 해 온 대기업들은 3∼4개, 많아도 5∼6개의 핵심기업을 빼고 나머지는 정리해야 한다는 주문이다. 대기업이 제시한 자체 구조조정계획에 대한 실망의 표현이자 재벌정책의 큰 방향을 구체적으로 밝힌 발언이어서 주목된다. 몇개의 ‘핵심기업’만 남기라는 말은 업종을 전문화해야 한다는 뜻이다. 사실 우리 재벌은 그동안 손 안댄 업종이 없을 만큼 모든 분야에 걸쳐 계열기업을 확장해 왔다. 그 결과 어느 한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우뚝한 산업을 키우지 못했다. 세계랭킹에 드는 기업이 없지 않지만 그것은 그룹단위일 뿐 한 업종, 한 기업단위로 세계적 랭킹에 오르는 기업이 없다는 것은 바로 우리 재벌의 허약한 경쟁력을 말해준다. 업종전문화가 재벌개혁의 핵심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주문은 국가경제의 경쟁력 제고를 최대현안으로 지적하고 있는 국제통화기금(IMF)권고와도 맞는 정책방향이다. 물론 어떤 기업그룹이 거느리는 기업의 수나 업종의 범위 자체가 문제일 수는 없다. 많은 업종에 투자하고 있더라도 하나 하나가 경쟁력 있고 건실하다면 문제삼을 이유가 없다. 그러나 우리 재벌그룹들은 차입에 의존해 몸집을 키우는 데 급급하던 끝에 부채가 많게는 자기자본의 37배, 적어도 몇배가 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것이 금융부실을 초래하고 국가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 역대 정권이 필요는 인정하면서도 재벌개혁에 손을 대지 못했던 근본이유가 거기 있다. 핵심기업만 남기고 나머지를 정리해야 한다는 주문은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 고리를 과감하게 끊어 재무구조개선을 유도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일 것이다. 김차기대통령의 발언이 있자 재계는 크게 당혹해하면서 진의를 파악하느라 비상이 걸렸다. 갑자기 40∼50개 기업을 팔려고 내놓으면 사겠다는 곳이 있겠느냐는 반발도 있다. 아무리 업종정리라지만 3∼6개만 남기라는 주문이 ‘위협적’으로 들릴 수밖에 없는 재벌그룹 입장에서는 있을 법한 반응이다. 계열기업이 팔리지 않아 문을 닫게 될 때 국가경제에 미칠 영향도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재벌의 구조조정은 국민적 요구사항이다. 상호지급보증 해소와 은행의 신용평가 강화조치 등으로 재벌 스스로도 피할 수 없다고 느끼기 시작한 과제다. 그러나 경제와 기업은 생명체와 같아 강요나 우격다짐으로 체질개선을 서두르다가는 일을 그르칠 수도 있다. 재벌에 업종전문화와 재무구조개선을 요구하는 근본이유는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대기업그룹이 경쟁력을 갖춘 세계적 기업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자는 데 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구조조정의 속도나 외형이 아니라 개혁의 성공에 있다. 정부요구에 마지 못해 하는 개혁이 아니라 재벌 스스로 앞으로의 진로를 선택하고 정진하는 그런 개혁이 되어야 한다. 정부 또한 재벌개혁을 돕는 자세로 법과 제도를 통해 여건을 조성함으로써 국가경제에 도움이 되게 이끌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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