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김충식/뒷사람이 밟는 발자국

  • 입력 1998년 1월 22일 19시 46분


새하얀 눈밭을 간다. 은빛 들판에 발자국을 찍어 간다. 누구도 딛지 않은 그곳에 길을 새긴다. 그 길은 뒷사람들이 밟아 걸을 것이다. 그래서 앞서 찍는 발자국은 빗나가고 흐트러져서는 안되리…(踏雪野中去 不爲胡亂行 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 조선조 서산대사가 적은 시의 이미지다. 김구(金九)선생은 이 서산대사의 시구를 즐겨 휘호로 옮겼다고 한다. 그 복사본인지 원본인지 모를 한 장이 상도동 김영삼총재댁 응접실에도 걸려 있었다. 지금 고치는 집에선 어떻게 되었는지 알길이 없지만, 야당 출입기자로 그 응접실을 드나들며 그 뜻을 되뇌던 기억이 새롭다. 그 응접실에는 휘호 하나가 더 있었다. 극세척도(克世拓道). 세상을 이겨나가며 길을 개척한다는 뜻일 것이다. 그 커다란 넉자는 집주인 YS의 붓글씨다. 거리의 나뭇가지에 잔설이 희끗한 이 아침, 문득 그 상도동 집의 휘호를 떠올린다. 그리고 정확히 10년 전 정초, 그러니까 87년12월16일의 대통령 선거에서 떨어진 김영삼총재가 초췌하고 절망한 듯한 얼굴로 88년 신년인사를 나누던 장면이 선연하다. 그날 창밖에 성긴 눈발이 날렸었다. YS는 그 참담한 실패와 좌절을 딛고 5년 뒤 정상에 올랐다. 그리고 이제 다시 5년이 흘러 곧 야인으로 내려선다. 참으로 빠른 세월이다. 상도동 집으로 귀가한다면 그 몇자의 글씨와 빈손으로 마주하게 될 것이다. 차가운 인심에 둘러싸인, 적적한 나날일 것이다. 어쩌면 붓글씨 몇자의 메시지처럼, 바르게 걷자던 다짐, 길을 열어간다는 각오, 큰길을 거리낌없이 걸어가자는 스스로의 맹세가 왜 이리도 오늘날 초라하고 허망하게 귀결했는지를 스스로 되물을지도 모른다. 너나없이 IMF사태로 아픔을 겪는다. 그래서 비아냥거리는 언어도 더 독해진 모양이다. 이름하여 YS정부의 5대업적이라던가? 첫째, 출퇴근 교통난을 말끔히 해소했다. IMF사태이후 기름값이 천정부지로 올라 결국은 차를 몰고 다닐 수가 없게 되었다. 둘째, 차가 적으니 대기오염도를 개선했다. 서울시의 최근 조사발표에서도 입증된다. 셋째, 과소비 향락도 말끔히 씻어냈다. 심야 거리가 썰렁하고 승용차 출고량은 지난해 11월한달 전년대비 29.4%나 줄고 위스키 판매도 49.7%가 급감했다. 넷째, 북한과의 격차를 줄인다더니 5년 동안 한국을 알거지로 만들어 북한처럼 하향평준화해 놓았다는 얘기. 다섯째, ‘돌아오는 농촌’을 만드는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도시에서 낙오한 월급쟁이나 자영업자가 시골로 귀향하고 시골 땅값이 오르고 있지 않는가. 김영삼대통령 자신도 기막힌 일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스스로는 칼국수만 먹고, 재벌로부터 돈 한닢 안받았다는데 그런 부패가 생기고 경제는 전란이 휩쓸고 간 이상의 난국으로 빠지고 말았을까. 그 원인이야 여러 갈래이겠지만 나는 하나의 시사(示唆)를 최근 발견했다. 김대통령 밑에서 정무수석과 문화체육부장관을 지낸 주돈식(朱燉植)씨의 저서 ‘문민정부 1천2백일’에 적힌 딱 한줄(29쪽)이다. 새 통치 리더십의 제약사항이라는 제목아래 ‘잘못된 참모진의 업무관행인 할거주의와 무책임〓누구에게도 책임을 지지 않고 오로지 대통령 한사람에게만 신임을 얻으면 된다는 식으로 업무를 추진해 상호 혼선을 일으키는 예가 많음’이라고 적혀 있다. 놀랍게도 이런 보고서는 벌써 임기 첫해에 쓰여지고 있었다. 시스템 대신 ‘충성’만 판쳐서는 안된다는 경고는 무시되었다. 김대중차기대통령의 출발도 상큼하다. 그를 찍지 않은 이들이 더 안도하고 “국운이 살아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밟지 말아야 할 전철(前轍), 눈위의 발자국길은 뒷사람들이 되밟을 가능성이 더없이 크다. 그것이 역사의 가르침이다. 역사속의 5년은 순간이다. 김충식<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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