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길, 당신과 어깨를 부딪치며 서둘러 지하철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던 누군가의 얼굴을 기억하는지. 구두코만 내려다보며 묵묵히 지하도 계단을 오르던 그 무수한 발들의 임자를 쳐다본 적이 있는지. 첫 창작집 「루빈의 술잔」(문학동네)을 내놓은 신예소설가 하성란(30). 작품의 주인공들은 이런 「익명」의 얼굴들이다. 지금 당장 지상에서 소멸한다 해도 나뭇잎 하나 흔들릴 진동조차 남기지 못할 것같은 「그림자인간」들. 오차없는 시계처럼 질서정연하게 돌아가는 세계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그들에게 하성란의 간절한 눈길이 닿는다. 그들의 존재가 바로 그의 모습이자 우리들 대부분의 삶이므로….
표제작 「루빈의 술잔」의 두 여자. 행정착오로 똑같은 주민등록번호를 가진 채 서른해를 살아온 기이한 인연. 백화점 붕괴사고로 남편을 잃은 뒤 외부와의 소통을 거부했던 한 여자가 다른 한 여자를 찾는다. 같은 날 태어난「다른운명」에대한 필사적인기웃거림이다.
다른 여자 송미경. 10년째 「한흥은행 2번창구」에 붙박이 가구처럼 앉아 있는 그는 사고로 한쪽다리의 발육이 멈춰버리기 전까지는 바람처럼 운동장을 가르던 달리기선수였다.
익명의 여자는 낮시간동안 「송미경」의 빈방에 몰래 스며든 뒤 이웃집여자와 친구가 되기도 하고 슈퍼마켓 할인코너의 악다구니속에 쓸려들어가기도 하며 한가롭게 뜨개질에 몰두하기도 한다. 시체도 찾지못한 남편의 죽음 이후 삶의 끈을 놓아버렸던 여자가 송미경의 그림자노릇을 통해 비로소 삶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는 것이다. 10년동안 「사표를 쓰리라」는 헛된 다짐만 거듭하며 시들어가던 송미경 역시 자신과 주민등록번호가 같은 여자가 제 침대에 떨어뜨리고 간 장미꽃 뜨개본 덕분에 뜨개질이라는 새로운 일에 몰두하게 된다.
운명에 기습당해 상처받고 부서진 사람들일지라도 2인3각을 하듯 서로의 존재를 버텨줄 수 있다는 믿음. 「익명」으로 사라져가는 존재들에게 「지구상에 단 하나뿐」이라는 무게를 실어주려는 역설의 의지. 나이나 등단연도(96년 서울신문)로만 보면 「신세대작가」와 동류로 묶일 하성란이 그들과 사뭇 다른 빛깔로 반짝이는 이유는 삶에 대한 이런 성찰에 있을 것이다.
집안형편때문에 동갑내기들이 대학을 졸업할 나이에 비로소 무역회사 경리사원에서 대학생으로 탈바꿈할 수 있었던 하성란. 갖고싶은 것을 가질 수 없는 안타까움,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져 한없이 외로웠던 날들의 기억을 갖고 있는 그이기에 하성란이 던지는 「희망」의 메시지는 공허하지 않다.
『소외감을 느낄 때 내 존재의 틈을 열고 조금만 나가보자고 얘기하고 싶었어요. 외로워도 인생은 살만한 것 아닌가요』
〈정은령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