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하일지판 아라비안 나이트(576)

  • 입력 1997년 12월 6일 20시 48분


제10화 저마다의 슬픈 사연들 〈44〉 마신의 물음에 나는 달리 대답할 여지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 여자분은 대체 누구입니까? 아닌 게 아니라 저는 저 분을 한번도 뵈온 적이 없습니다』 그러자 마신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습니다. 『암, 그렇겠지. 너희 두 연놈들은 한 통속이니까 말이야. 그럼, 이 칼을 잡아라. 그리고 이년의 목을 쳐라. 만약 이년의 목을 치면 이년을 모른다고 한 너의 말을 믿을 것이요, 너에게 어떤 화도 입히지 않겠다』 이렇게 말한 마신은 나에게 칼을 내어밀었습니다. 나는 마지못해 칼을 받아들기는 했습니다만 차마 여자를 죽일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여자는 눈짓으로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망설이지 마시고 제 목을 치세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마신은 당신을 살려주지 않을 거예요. 저는 어차피 죽을 몸, 차라리 당신의 손에 죽는 게 나아요』 그리고 여자는 계속해서 눈짓으로 이런 말도 했습니다. 『오, 세상에 둘도 없이 사랑하는 분, 당신은 나에게 죽음보다도 강한 사랑을 가르쳐주었답니다. 당신은 저를 진정한 여자로 만들어주었고, 세상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환희를 맛보게 하였습니다. 이제 저에게 마지막 소원이 있다면 사랑하는 분, 당신의 손에 죽고 싶다는 거예요』 그녀가 눈짓으로 이렇게 말하는 순간 나의 두 눈에는 뜨거운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칼을 내던지며 말했습니다. 『오, 힘센 마신이여! 천하의 영웅이여! 힘도, 지혜도, 신앙도 없는 한갓 나약한 여자의 목을 베는 것은 남자인 저로서는 차마 할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나에게 아무 죄도 지은 적이 없는 여자의 목을 제 어찌 벨 수 있겠습니까? 비록 당신한테서 죽음의 술잔을 받아 마시는 한이 있더라도 나로서는 차마 그런 몹쓸 짓을 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이렇게 부르짖자 마신은 말했습니다. 『너희 연놈들은 잘도 배가 맞는구나! 그 따위 수작을 하면 어떤 꼴을 당하게 되는가 하는 걸 곧 알게 해 주겠다』 이렇게 말한 마신은 바닥에 떨어진 칼을 집어들더니 느닷없이 칼을 휘둘러 여자의 두 손과 두 발을 잘라버렸습니다. 그야말로 눈깜짝할 사이에 당한 일이었습니다. 나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여자에게로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여자는 한마디 비명도 지르지 않고 눈으로는 나를 찾고 있었습니다. 『오, 이럴 수가?』 나는 그러한 그녀를 굽어보며 소리쳤습니다. 그러나 여자는 가득히 미소 띤 낯으로 나를 올려다 보며 눈으로는 마지막 작별인사를 보내왔습니다. 죽어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녀는 나를 사랑하였던 것입니다. 여자의 사랑이 그렇게 강한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그때서야 알았습니다. 『이 독한 년! 네년은 서방질을 해 잘도 나를 오쟁이지웠구나!』 여자가 나에게 눈짓으로 마지막 작별인사를 보내는 걸 본 마신은 미친듯이 소리쳤습니다. 그와 동시에 다시 한번 칼을 휘둘렀는데, 그 칼질에 여자의 목은 여지없이 달아나고 말았습니다. 짧고 애달픈 나의 사랑은 그렇게 끝난 것이었습니다. <글:하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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