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수필]이성순/시부모님의 「빛바랜 사진」

  • 입력 1997년 7월 18일 08시 12분


이삿짐을 싸기 위해 서랍 구석구석을 정리하다 우연히 빛바랜 옛날 사진 몇장을 발견했다. 그 중에서도 내 눈길을 끈 것은 남편이 초등학생의 앳된 모습으로 어머님 아버님과 환히 웃고 있는 모습의 사진이었다. 아버님은 당시 병환중이었는데 사진을 찍고나서 얼마 뒤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래서 사진속의 아버님 얼굴은 병이 깊어 마르고 거무칙칙한게 생기가 없는 모습이다. 아버님은 별로 말씀은 없어도 사람들을 좋아하고 자상하고 마음씨 좋은 분이셨다는 얘기를 어머님을 통해 가끔 들어왔다. 그래서인지 병은 깊어도 초연한 듯한 눈빛이었고 뒤늦게 본 어린 아들을 앞에 앉히고 사진을 찍는 것을 뿌듯하게 여기시는 듯했다. 아버님이 세상을 떠나신지 20년이 지났다고 한다. 한번도 뵌 적은 없지만 그 사진을 보고 있으면 왠지 늘 가까이에서 나를 지켜봐주시고 있는 듯이 따뜻하게 느껴져 내 수첩안에 그 사진을 끼워 두었었다. 살아계셨다면 이 어린 며느리에게도 자상하게 잘 해주셨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 병든 아버님 옆에는 어머님이 앉아 계신데 당시 쉰이 넘은 나이에도 앳되고 생기발랄한, 한점 그늘이라곤 없는 얼굴이었다. 어머님께도 이렇게 젊고 밝은 세월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에 문득 마음 한구석이 저려왔다. 일흔일곱 해를 살아오시면서 병 한번 크게 앓아 본적이 없다는 건강하신 분이 요즘 들어 부쩍 기운없이 방안에 누워만 계시거나 잠깐의 외출에도 무척 힘겨워 하시는 모습이다. 칠순이 지난 연세에 며느리를 얻고 이제 손자 손녀까지 보셨다. 어머님은 물론 동네 어른들까지도 무척 좋아들 하셨는데 이제는 다가올 죽음을 생각하면서 자주 눈물을 보이신다. 어머님과 함께 지내온지도 7년여. 그동안 며느리로서 어머님께 서운한 감정을 느낀 점도 있긴 했지만 내가 어머님을 서운하게 해드린 적이 더 많았다는 생각을 하니 가슴이 아프다. 빛바랜 사진속에 환한 모습, 그 젊음을 다시 찾아드릴 수는 없겠지만 주름진 얼굴에나마 환한 웃음을 지으시게 해드려야겠다. 이성순(서울 중구 만리1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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