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론]정운찬/진정한 금융개혁

  • 입력 1997년 6월 18일 20시 07분


금융개혁의 화두가 연일 언론을 강타하고 있다. 특히 중앙은행 독립과 금융감독체계 개편 문제를 둘러싼 재정경제원과 한국은행 사이의 날카로운 신경전은 일반국민에게도 흥미와 관심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금융개혁과 관련된 언론보도의 홍수 속에서 오히려 금융개혁은 실종된 느낌을 준다. 금융개혁 논의가 한국경제의 개혁이란 큰 맥락속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 「한국주식회사」의 독단 ▼ 한국경제는 지난 30여년간 이른바 한국주식회사(Korea,Inc.)로 운영되어 왔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정부가 주도적으로 나서서 은행을 수단으로 삼아 재벌 중심의 경제성장을 추구해 온 것이다. 최근의 「박정희 신드롬」이 말해주듯 과거에 미련을 갖는 수구적 입장은 언제나 존재해 왔다. 그러나 한국주식회사가 더 이상 유지될 수도 없고, 유지되어서도 안된다는 것은 이제는, 아니 십수년 전부터 명백한 사실이다. 따라서 한국주식회사의 중심축을 이루었던 정부 은행 재벌 각각의 역할과 상호관계를 재정립해야만 한다. 1997년판 금융개혁 선언 역시 이 틀을 벗어나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번에 논란을 빚고 있는 중앙은행제도와 금융감독체계 개편 문제는 바로 정부와 은행간의 관계를 재정립하려는 시도에서 나온 것이다. 선진 각국의 제도가 매우 다양하다는 사실에서 알 수있듯이,제도개선의 구체적 내용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다. 사실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보장하는 것은 제도 자체라기 보다는 정부의 의지다. 그러나 이번 정부의 개편안은 금개위안보다 훨씬 후퇴해 개혁의 의지를 별로 보여주지 않는다. 금융개혁을 둘러싼 논란이 진행되고 있는 와중에서도 재경원의 고위 간부들이 금융개혁에 역행하는 일들을 버젓이 자행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 아닌가. 그 대표적인 예가 부도방지협약, 민간은행장 인사 개입 등이다. 한편 이번 개혁안에서 어물쩍 넘어간 은행과 재벌 사이의 관계 재정립 문제는 다른 어떤 문제보다도 더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금개위의 제2차보고서에 따르면 재벌기업도 은행주식을 10%까지 보유할 수 있게 된다. 비록 몇가지 단서조항을 붙인 예외적 조치이지만 재벌에 관한 예외적 단서조항들은 항상 깨지게 마련이었다는 것이 우리들의 변함없는 경험이다. 과거 정부 은행 재벌 3자에 의한 한국주식회사에서 이제 은행까지 계열사로 거느린 재벌 1인의 한국주식회사로 가는 것이 금융개혁인가. ▼ 재벌개혁도 논의해야 ▼ 맹목적 시장주의자들은 자유화와 개방화가 진전되어 시장규율(Market Discipline)이 작동하게 되면 은행의 재벌 사금고화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재벌총수의 입장에서는 은행도 다른 수십개의 계열사와 마찬가지로 그룹 전체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하나의 계열사에 불과할 것이다. 은행이 갖고 있는 막대한 자금력과 정보력을 고려할 때 은행까지 계열사로 포함한 재벌의 막대한 힘은 결국 시장규율 자체를 마비시킬지도 모른다. 더구나 재벌총수의 힘은 약화되기는커녕 후손에게 그대로 승계되고 있다. 최근 세법과 주식회사제도의 맹점을 교묘하게 이용한 한 재벌의 3세 승계작업 앞에서는 그 어떠한 개혁조치도 설 자리가 없다. 개혁의지가 뚜렷하지 않은 개혁, 재벌개혁을 동반하지 않는 금융개혁은 실효성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위험하다. 이번 정권이 끝나기 전에 일사천리식으로 금융개혁을 마무리하려는 정부의 모습은 강력한 추진력의 표상이라기보다는 「개혁병」에 걸린 환자를 연상시킨다. 지금은 개혁에 관한 올바른 아이디어를 만들어 다음 대통령에게 넘겨줄 좋은 선물을 준비할 때다. 정운찬(서울대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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