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손숙/기다림에 지친 국민들

  • 입력 1997년 4월 14일 20시 12분


4월은 삭막한 여의도에 윤기가 도는 계절이다. 외곽 도로를 빙 둘러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나서 사람을 황홀하게 만든다. 특히 국회의사당 뒷길 윤중로의 벚꽃은 여의도의 명물이 되어 밤 늦도록 구경꾼들이 끊이질 않는다. 며칠전 밤 늦은 시간에 우연히 그쪽길을 지나갈 기회가 있었다. 가로등 불빛과 만개한 벚꽃으로 황량하던 국회의사당 건물도 그날 밤엔 제법 정취가 있어 보였다. ▼ 거대한 「거짓말의 늪」 ▼ 『저 크고 볼품없는 건물과 그 안에서 소위 정치를 한다는 사람들의 뻔뻔함과 거짓말엔 넌더리가 난다. 차라리 부숴버리고 공원이라도 만들었으면 좋겠다』 한보사건 청문회로 스트레스를 있는 대로 받은 사람들이 내뱉은 말중 하나다. 그래도 뭔가 이 답답한 현실을 풀고 진실을 규명해 주길 간절히 기다린 국민들에게 이번 청문회는 오히려 스트레스만 가중시킨 셈이 돼 버렸다. 철저하지 못한 준비, 당리당략에만 치중한 질문, 뻔한 거짓말, 품위없는 태도 등에서 우리의 미래가 참으로 암담하다는 절망감을 느꼈다. 지금 정치권은 스스로 헤어날 수 없는 거대한 거짓말의 늪에 빠져 있는 느낌이다. 하도 이리저리 거짓말을 둘러대다 보니 본인들도 혹시 착각하고 있는 부분은 없는지. 얼굴도 본 적이 없다, 절대로 한푼도 받지 않았다는데 그 리스트는 왜 그토록 끈질기게 돌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일전에 어느 고등학교에서 수업시간에 요즘 뉴스거리인 한보비리를 얘기하다가 선생님이 너희들중 전철과 버스를 한번도 무임 승차하지 않은 사람은 손을 들어 보라고 했더니 아무도 손 드는 학생이 없었다고 한다. 선생님은 『너희들은 도둑이다. 이런 너희들이 사회에 나가 정직하게 살 수 있겠느냐. 세상을 탓하기에 앞서 그동안 저지른 잘못을 사죄하는 편지를 쓰자』고 제안했다. 이에 한 학생은 언젠가 백화점에 갔다가 무심코 요구르트 한병을 훔쳐 마신 잘못을 사죄하는 편지를 쓰고 돈 1천원을 동봉해서 백화점사장 앞으로 보냈다고 한다. 「사장님 여기 요구르트값 5백원과 제 양심을 판값 5백원을 보내 드립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이 기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신선한 감동을 안겨 주었고 새삼 자신을 한번 돌아보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이제 국민들도 좀 감동적이고 신선한 경험을 한번쯤 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 솔직한 選良은 어디에 ▼ 『난 사실 한보 정태수 총회장으로 부터, 혹은 누구로부터 얼마의 돈을 받았다. 잠시 그 돈이 그냥 정치자금이라고 생각하고 받아 썼는데 깊이 반성한다. 국민들의 용서를 바란다』 이런 양심 선언을 하는 정치인이 단 한사람이라도 나온다면 이번 봄이 그렇게 절망적이지는 않을텐데. 그런 저런 이유에서라도 한보 리스트는 P, K, S따위의 이니셜을 빼고 명명백백하게 공개돼야 하며 억울한 사람들은 구제되고 또 벌 받을 사람들은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유언비어가 난무하는 세상, 그리고 그 유언비어가 결국은 거의 사실이라고 굳게 믿는 사회풍토가 개선되지 않는 한 올 봄도 혼란 속에 지나갈 것이고 그러다 보면 다가오는 여름에 나라는 질식상태가 되고 말 것이라는 좋지 않은 예감이 든다. 손숙 <연극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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