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여자의 사랑(47)

  • 입력 1997년 2월 19일 20시 17분


가을이 깊어지는 동안〈2〉 『누군데요? 그렇게 말해준 사람이』 『지금은 군에 가 있는 동생이야. 그리고 그런 말을 들었을 땐 내가 군에 가 있었고』 『형제간엔 그런 얘기도 서로 하는군요』 『그 자식도 대학에 입학할 때 어머니한테 연애에 대한 충고를 들었을 거야. 사내가 그러면 없는 돈 더 쪼달리게 된다는 얘기를 말이지. 그런데 내가 군에 가 있는 동안 이 녀석이 연애를 한 거야. 지금도 진행중이어서 여자가 가끔 면회를 가고 하는 모양인데, 그때 녀석이 그랬어. 형도 이 다음 여자를 사귀게 되면 앉아 있는 시간보다 걷는 시간을 많이 가지라고』 『무슨 뜻이죠?』 『내가 마지막 휴가를 나왔을 때였는데 그때 녀석의 얘기는 어머니의 충고에 대한 변명 같은 것이었어. 그러니까 궁색한 모습 보이지 않고도 가까워질 수 있다, 그런 뜻으로 말이지』 『그러면 지금도 그런 뜻을 감추고 늘 이렇게 거리를 걷는 건가요?』 『아니. 아까도 얘기했지만 가장 빠르게 서로가 서로에게 조금씩 조금씩 익숙해진다는 거지. 걸음걸이의 보폭까지 맞추다 보면 저절로 말이지』 실제로 많은 시간을 함께 거리를 걷는다는 것은 그랬다. 정처없이 떠돌듯 이 거리 저 거리를 걷다보면 이미 걷는 동안에도 그것을 느낄 수 있을 만큼 서로가 서로의 곁에 붙어 있는 게 자연스럽고도 당연하게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카페 같은 곳에 앉아서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은 더러 상대방의 다른 마음에 대해서도 신경써야 할 때가 있지만 걷는 것은 서로 그런 일에 신경쓰지 않고도 가깝게 다가갈 수 있었다. 그녀가 독립군의 집안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것도, 또 독립군과는 전혀 다른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라온 자신의 집안에 대한 이야기를 했던 곳도 마주 앉은 카페에서가 아니라 함께 길을 걸으면서였다. 시집간 언니의 이야기도 하고, 매년 봄마다 한 차례씩 밀고 당기기의 노사분규를 겪는 아버지의 회사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했다. 그녀로선 서로 다르게 자라온 환경에 매우 조심스럽게 한 이야기였는데, 독립군은 그런 것에 별로 개의하지 않는 듯한 얼굴을 했다. 그러는 동안 거리에서 새삼 깨달은 것이 있다면 나무들은 가을 한중간에도 여전히 여름처럼 푸르다는 것이었다. 단지 하늘만 발돋움을 하듯 한뼘 한뼘 위로 올라갔다. 비라도 한 차례 뿌리고 난 다음엔 두뼘 세뼘 그렇게 올라가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그녀의 치마는 허벅지 중간쯤의 맨살에 착 달라붙어 있었다. 함께 길을 걸을 때에도 그랬고 달리는 오토바이 뒤에 앉아 있을 때에도 그랬다. <글:이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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