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254)

  • 입력 1996년 12월 26일 20시 24분


사랑의 경시 〈1〉 나는 지금 상현을 기다리고 있다. 이 카페에서는 비틀스의 음악만을 튼다. 카페 이름도 비틀스의 노래명인 「인 마이 라이프」다. 시디를 갈아 끼우고 있던 아르바이트생인 듯한 젊은 남자에게 나는 맥주를 주문한다. 좁고 어두운 이 낡은 카페에 나 말고 다른 사람은 그뿐이다. 약속장소를 이 카페로 정하면서 상현은 감회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차 타고 지나가는데 터널 나오자마자 그 간판이 눈에 들어오더라구. 옛날 그대로였어.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더라. 우리가 거기에서 다시 만날 줄 알고 아직 안 없어진거라고 말야. 그러더니 이렇게 첫만남부터 약속시간을 어기고 있는 것이다. 상현이 인도에서 돌아온 지는 두 주일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세 번 갔는데 이번에 제일 오래 있었어. 이년이나 있었으니까. 서울에 돌아올 때마다 너를 좀 찾아보고 싶었지만 그게 잘 안 되더라구. 이번에는 아주 돌아온 거야. 이제 인도라면 신물이 나. 그동안 계속 생각해왔는데, 내 인생이 질못되기 시작한 것은 전적으로 너를 잃은 다음부터인 것 같아. 나는 천천히 술잔을 비운다. 두병째의 병이 비어가고 있다. 내가 아는 상현은 아마 네댓 병쯤 마시고 나야 허겁지겁 문을 열고 들어올 것이다. 사람이란 크게 달라지지 않는 법이다. 그리고 내가 지금 술을 마시는 속도가 꽤 빠른 탓도 있을 것이다. 칠년 전에 이혼한 남편을 만나기 위해 나는 약간의 취기를 준비해야 했다. 상현의 전화를 받고 나서 내 첫 느낌은 반가움도 아니고 환멸도 아니었다. 상현은 우리 사이의 묵은 애증과 흘러가버린 세월 따위는 까맣게 잊은 듯했다. 심지어 우리가 이혼했다는 사실조차 잊은 사람처럼 스스럼없는 말투였다. 『빨리 보고 싶은데? 너도 내가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하지? 난 하나도 안 늙고 더 멋있어졌어. 네가 보면 옛날처럼 첫눈에 반해버릴 거야』 그의 말대로 그는 늙지 않았을 것이다. 자라지 않는 어린애이기 때문이다. 조금도 변함이 없는 그에게서 나는 반가움도 환멸도 아닌 거역할 수 없는 명운같은 것을 느꼈다.그에게 아무런 감정의 찌꺼기도 남아있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떨쳐버릴 수 없는 오래 전 전과의 기록처럼 내게 돌아왔다. 어쩌 삶이란 태어남에 대한 책무인지도 모르겠다. <글 : 은 희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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