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4세가 주관하여 신도시주거형식으로 만든 「왕의 광장」(보주광장)은 도시설계와 공동주택설계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중세도시는 농경지를 확보하고 방어의 고지를 선점하기 위해 강을 낀 언덕부지 위에 등고선을 따라 지어졌으므로 인구집중과 도시확대를 수용하지 못했다. 그러나 파리와 같이 로마제국의 식민도시로 시작한 도시는 보통 중심지에 로마의 군대가 주둔했던 유적이 있으며 이 주둔지를 중심으로 도시가 확대됐다.
보주광장은 무질서한 도시가로에 사각의 광장을 도입, 가로망을 재구축하고 사각의 광장 주위에 공동주택군을 배치하여 건축공간과 도시공간을 하나로 융합하였다. 이는 무질서한 중세도시 파리에 건축적 도시 기반시설을 도입하여 원래의 기하학적 정형을 회복케 한 것이다. 이후 파리의 도시계획은 기하학적 질서의 바탕 위에 기왕의 유기적 질서를 수용하는 방향으로 전개됐다.
나아가 보주광장은 사유의 공간만으로 이루어진 공동주택에 처음으로 마을공동체의 공간을 도입했다. 고대도시의 주거는 대부분 단독주택형식이었으나 도시화가 진전되면서 공동주택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집과 집이 단순히 이어지는 중세도시의 연립주거형식이 르네상스시대에는 수직공간을 공유하는 집합주거형식이 되었다. 유럽에서 우리가 흔히 보는 주거형식은 이때 시작된 것이다.
보주광장은 사유공간만이었던 공동주택에 공유공간을 중심으로 한 집합주거형식을 처음으로 시도했다.
당시 사각의 광장, 원형의 광장, 삼각의 광장 등 기하학적 공유공간을 가진 많은 공동주택이 파리의 주요도시구역에 지어졌다. 기하학적 도시질서와 공유공간을 중심으로 수직과 수평의 집합주거형식을 실현한 보주광장의 도시설계 이념은 이후 오스만 남작에 의해 주도된 파리개혁의 중심사상이 되었다.
우리의 도시에 서면 어지럽다. 도시는 자동차와 개인공간에 의해 파괴되고 주거단지에는 개인공유만이 있을 뿐이다. 낮에는 도시에 밀려 살다가 밤에는 아파트 한 칸에 의지하여 산다. 보주광장이 4백년 전 실현한 기하학적 도시공공공간과 공유공간을 중심으로 한 사유공간의 집합주거형식이 우리의 도시 한 가운데서도 시작되어야 한다. 중세도시 파리가 오늘의 파리가 되기까지 보주광장의 설계자와 같은 수많은 건축가들의 참여가 있고 오스만 남작팀과 같은 백년을 내다본 도시개혁의 기수들이 있었다.<김석철씨:아키반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