左 재현 右 동주…두 라이벌의 엇갈린 야구인생

  • 스포츠동아
  • 입력 2015년 2월 2일 06시 40분


고교 시절부터 라이벌로 꼽혔던 김동주와 김재현의 야구인생 마무리는 극명히 엇갈렸다. 김재현은 SK 시절이던 2010년 우승 후 깨끗하게 은퇴했다. 스포츠동아DB
고교 시절부터 라이벌로 꼽혔던 김동주와 김재현의 야구인생 마무리는 극명히 엇갈렸다. 김재현은 SK 시절이던 2010년 우승 후 깨끗하게 은퇴했다. 스포츠동아DB
한때 “계약금 더 받아야” 경쟁의식 치열
김재현 SK 우승 후 은퇴…김동주와 대조

1993년 9월 21일자 동아일보에 ‘신일 김재현, 배명 김동주 좌-우 최강타자 가린다’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김재현은 ‘대통령배에서 홈런, 타점, 안타상을 휩쓴 장효조 이후 최고의 왼손타자’, 김동주에게는 ‘투수를 겸하면서도 전국대회에서 0.769라는 놀라운 타율을 기록하고 있다’며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 출전하는 한국아마야구의 내일이 이들의 양어깨에 걸려있다’고 소개했다.

김재현(39) 한화 코치와 두산에서 스스로 퇴단, 결국 새 팀을 찾지 못하고 은퇴한 김동주(38)는 고교시절 ‘좌 재현, 우 동주’로 불린 최고의 타자이자 운명의 라이벌이었다. 고교졸업 후, 프로와 대학진학으로 시작된 엇갈림은 프로에서 유니폼을 벗는 마지막 퇴장까지 극명히 달랐다.

고교시절 김재현은 1학년 때부터 고 조성민, 설종진, 강혁 등 쟁쟁한 선배들과 함께 주전으로 활약한 천재 타자였다. 당시 고교 랭킹 1위로 꼽혔던 휘문고 임선동의 공을 잘 치기로 유명했다. 동기생인 조인성(한화), 1년 선배 강혁과 함께 고교무대를 평정했다. 반면 김동주는 약체 배명고의 고독한 4번타자이자 에이스였다. 연세대와 고려대는 각각 김재현과 김동주를 스카우트했다. 그러나 김재현이 연세대 입학을 취소하고 LG행을 택하면서 첫 번째 엇갈림이 시작됐다. 당시 LG는 김재현과 ‘만약 김동주가 OB와 계약할 경우 그 계약금보다 1000만원을 더 받는다’는 내용에 합의할 정도로 고교 최고 타자에 대한 자존심 경쟁이 뜨거웠다.

김재현은 1994년 고졸 신인으로 20홈런, 20도루를 달성하며 LG 우승을 이끌었다. 잘생긴 외모로 지금의 아이돌 스타에 버금가는 인기를 자랑했다. 김동주는 대학시절 1997년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결승서 일본을 상대로 백투백 홈런을 기록하는 등 대학무대를 평정한 후 1998년 계약금 4억5000만원을 받고 OB에 입단했다. 거포로서 활약은 김재현보다 뛰어났고 국가대표 팀에서도 4번을 치는 등 국제무대에서 활약은 김재현을 압도할 정도였다. 특히 김재현이 고관절 부상과 수술, LG의 각서 요구 등 어려움을 겪은 후 SK로 팀을 옮겼지만 김동주는 두산의 대표적인 스타로 자리를 지켰다.

큰 엇갈림은 2009년 시작됐다. SK에서 2007년 한국시리즈 MVP에 오르며 화려한 부활에 성공한 김재현은 2009년 KIA와 한국시리즈를 앞두고 “내년(2010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 한 뒤 은퇴하겠다”고 ‘예고은퇴’를 선언했다. 그리고 1년 후 한국시리즈 우승확정 경기를 은퇴경기로 만들며 멋지게 약속을 지켰다. 반면 팀의 리더 스타일이 아니었고 자기 색깔이 강했던 김동주는 감독들의 외면 속에 쓸쓸한 선수생활 황혼기를 보냈다. 현역 연장을 위해 두산에서 자진 방출됐고 조범현 kt감독이 마지막 손길을 내밀었지만 구단에 더 후한 계약을 요구하다 결렬됐다. 그리고 더 이상 찾는 팀이 없자 은퇴를 밝혔다.

이경호 기자 rush@donga.com 트위터 @rushlk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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