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건의 아날로그 베이스볼] 이규석 “심판은 독수리 눈…선동열한테도 한 수 가르쳐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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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년 1월 31일 07시 00분


이규석 대한야구협회 기술이사. 스포츠동아DB
이규석 대한야구협회 기술이사. 스포츠동아DB
원년 심판 이규석씨의 20세기 한국 프로야구 회고 ⑤

슬럼프 김형석, 한숨 푹 쉬더니 타석에
‘발 넣고 쳐봐’ 조언에 거짓말 같은 홈런
심판실 찾은 선동열에겐 ‘나이탓’ 진단

선수 가까이서 본 심판 판단 때론 정확

‘유승안 헤딩사건’은 말도 안되는 오심
벌금 4만원…2214경기 중 유일한 징계

투수 볼 받다보니 볼 보는 눈 정확해져
기가 막혔던 선구안…심판은 내 운명!

아날로그 시대에 심판은 경기 도중 선수들과 대화도 나눴다. 엄한 심판 이규석도 선수들과 친했다. 심판은 선수들의 슬럼프 여부를 누구보다 먼저 알았다. 누구보다 가까이서 선수를 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이유도 있다. 매일 선수와 함께 지내는 코치의 눈에는 보이지 않던 작은 변화를 심판은 쉽게 알아챘다. 띄엄띄엄 보기 때문이었다. 서로 신뢰가 쌓이면서 상의를 해오던 선수도 있었다. 이규석이 기억하는 에피소드다.

이규석 심판은 원포인트 레슨으로 OB 김형석의 슬럼프 탈출을 돕기도 했다. 스포츠동아DB
이규석 심판은 원포인트 레슨으로 OB 김형석의 슬럼프 탈출을 돕기도 했다. 스포츠동아DB


○하소연하고 홈런 친 김형석

OB 김형석이 롯데와 경기할 때였다. 그때 김형석은 슬럼프를 겪고 있었다. 타석에 들어섰는데 상하체가 따로 놀았다. “너 그래가지고 밥 벌어 먹겠냐”고 했다. 김형석이 한숨을 내쉬며 “죽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라고 하소연했다. “칠 때 발을 집어넣고 쳐봐”라고 충고했다. 김형석은 “알았습니다” 하더니 홈런을 날렸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롯데 포수 김선일이 “알려주면 어떻게 해요”라고 항의했다. “어쩌겠냐. 서로 먹고 살아야지. 너도 알려줄게” 하면서 무마했다.

천하의 선동열도, 최고의 좌완 양상문도 이규석 심판에게 고충을 토로하며 조언을 구하던 시절이 있었다. 선동열이 해태 유니폼을 입고 마운드 위에서 힘차게 공을 던지고 있다. 스포츠동아DB
천하의 선동열도, 최고의 좌완 양상문도 이규석 심판에게 고충을 토로하며 조언을 구하던 시절이 있었다. 선동열이 해태 유니폼을 입고 마운드 위에서 힘차게 공을 던지고 있다. 스포츠동아DB

○선동열-양상문, 갈 길을 묻다!

1995년 선동열이 일본에 진출하기 전이었다. 경기 전 심판실로 찾아왔다. “요즘 공이 이상하다”며 이유가 뭔지 물어봤다. 그래서 “어디 아픈 데 있냐”고 했다. “없다”는 답이 왔다. “그럼 올해 나이가 몇이냐”고 물었다. 서른 살이 넘어가면 전성기보다는 못한 공이 나오기 때문이다. 선동열은 ‘나이 탓일지도 모른다’는 얘기에 수긍하지 않고 돌아갔다. 시즌을 마친 뒤 일본으로 진출한다는 발표가 나왔다. 이규석 개인적으로는 ‘가지 않았으’면 했다. 한창 때도 아니었고, 그 해에는 정말 공이 좋지 않았기에 걱정했다. 결국 선동열은 일본야구 진출 첫 해 적응에 실패했다.

양상문도 어느 날 그를 찾아왔다. “공이 마음대로 안 간다”고 했다. 팔이 많이 쳐져 있었다. 그래서 그 점을 지적해줬다. 선수나 코치는 오랜 시간 같이 있다보면 사소한 변화를 놓치기 쉽다. 심판은 그럴 때 정말 중요한 한 수를 알려줄 수 있다.

심판은 코치보다 더 가까이서 선수들을 지켜보는 사람이다. 이규석 대한야구협회 이사가 프로야구 초창기부터 18년간 심판으로 살아온 자신의 인생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았다. 사진은 프로야구 초창기 심판의 모습. 스포츠동아DB
심판은 코치보다 더 가까이서 선수들을 지켜보는 사람이다. 이규석 대한야구협회 이사가 프로야구 초창기부터 18년간 심판으로 살아온 자신의 인생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았다. 사진은 프로야구 초창기 심판의 모습. 스포츠동아DB


○유일한 오심, 1987년 ‘유승안 헤딩사건’

심판 생활 18년간 2214경기에 출장했다. 이 가운데 단 한 경기도 완벽하게 판정을 마친 기억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이규석은 그 세월 동안 단 한 차례만 징계를 받았을 정도로 모범심판이었다. 그에게 오점을 남긴 경기가 1987년 있었다. 벌금 4만원이 부과된 ‘유승안 헤딩 사건’이었다. 1987년 9월 9일 잠실 빙그레-MBC전. 빙그레 유승안은 1-2로 뒤진 9회초 1사 이후 좌중간으로 장타를 때렸다. 홈런처럼 보였다. 그러나 타구는 펜스 상단을 맞고 들어왔다. 여유를 부리다 간신히 2루까지 달려간 유승안이 두 손을 무릎에 대고 허리를 구부린 채 한숨을 쉬는데, MBC 김재박이 릴레이한 볼이 유승안을 향했다. 유승안은 피하지 않고 공을 머리로 받아버렸다. 공은 1루 벤치 쪽으로 갔다. 그 틈에 3루까지 내달렸다. 결론은 간단했다. ‘유승안의 수비방해냐’, 아니면 ‘김재박의 송구실책이냐’였다.

헤딩하는 순간 유승안은 베이스를 밟고 있었다. MBC 유백만 감독대행은 “수비방해다. 아웃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빙그레 배성서 감독은 “3루에 가야 한다. 아니라면 아웃”이라고 어필했다. 심판들이 모여 합의를 했다. 이규석은 1루심이었다. 헤딩은 절묘했다. 고개만 살짝 돌려 송구의 방향만 틀어놓았다. 1루수 김상훈은 “고의로 그랬죠?”라며 심판에게 물었다. 심판은 관례를 깨고 유승안에게 “고의로 그랬냐?”고 물었다. 대답이 걸작이었다. “그것도 기술인데, 뭐 어때요.” 여기서 심판의 고민이 시작됐다. 워낙 잘 맞은 타구였기 때문에 아웃시키기에는 아깝다는 생각과 아웃시켰을 경우 배성서 감독의 강력한 어필이 신경 쓰였다. 결국 심판진은 합의로 3루의 유승안을 2루로 돌려보냈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내용이었으나 오심이었다. KBO는 그날 합의에 관여한 4심에게 벌금 4만원씩을 부과했다. 이규석이 받은 유일한 벌금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판정이었다. 다른 심판들도 그러자고 해서 따르기는 했지만, 오심이었다.”

이규석 심판(왼쪽 3번째)이 1999년 8월 18일 잠실 한화-LG전에서 심판으로는 최초로 2000경기 출장 기록을 세운 뒤 기념시상식을 하고 있다. 사진 제공|이규석 대한야구협회 이사
이규석 심판(왼쪽 3번째)이 1999년 8월 18일 잠실 한화-LG전에서 심판으로는 최초로 2000경기 출장 기록을 세운 뒤 기념시상식을 하고 있다. 사진 제공|이규석 대한야구협회 이사


○심판은 내 운명


되돌아보면 심판은 운명이었다. 1974년 경기상고 감독을 마치고 쉬던 차에 친구 황석중이 심판교육을 받자고 했다. 당시 유류파동의 여파로 경제적 상황이 어려워 심판을 새로 뽑는다는 얘기도 없었다. 그 때 포기했으면 심판 이규석의 인생은 없었을 것이다.

“무슨 배짱인지는 모르겠지만 심판교육에 참가했다. 기존 심판들 틈에 끼어 황석중과 교육을 받았다. 별로 어렵지 않았다. 철도청 운동장에서 교육을 했는데, 다 마치자 수료증을 줬다. 그 이후 심판이 됐다. 초등학교 경기부터 시작했다. 차츰 하면서 이력이 쌓이고 유명한 심판 민준기 씨가 열심히 하는 나를 잘 봤던지, 많은 경기에 투입시켜줬다. 이력이 쌓이면서 중학교, 고등학교에 이어 국제경기에도 심판을 봤다.”

이규석은 3루수 출신이다. 스트라이크존이 정확했던 그에게 선구안은 타고난 것일까. “어느 정도는 타고 난다”고 했다. 좋은 투수를 만나 행운도 함께 했다. 이것도 다 운명이었는지 모른다. “성군관대 신입생 때였다. 재일동포 투수가 한 명 있었다. 한광홍이라고 유명했던 투수였는데, 컨트롤이 기막혔다. 나중에 성균관대 감독도 했다. 1학년 때 그 선배의 공일 매일 받아줬다. 그때 스트라이크존에 대한 나름대로의 개념이 생겼던 것 같다.”

1999년 8월 18일 잠실 한화-LG전. 이규석은 프로야구 최초로 2000경기에 출장하는 기록을 세웠다. 이날 이규석은 “2500경기 출장이 목표”라고 말했다. 그를 축하하려고 경기장을 찾은 박용오(작고) 한국야구위원회(KBO) 총재는 “될 수 있는 한 오래하십시오”라고 했다. 그러나 그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다. 2001년 전반기를 마치면서 현장을 떠났다.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가 없었다. 2002년 경기운영위원이 됐고, 이후 대한야구협회 심판이사를 거쳐 지금은 기술이사로 있다. “한때는 목표했던 2500경기를 채우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지만, 지금은 옛날 얘기다. 현역복귀에 대한 생각도 한동안 했지만, 너무 오래 떠나 있었고 나이도 있어 꿈을 접었다.”

그러나 지난해 10년여 만에 마스크를 썼다. 해외에서 벌어진 국제대회였다.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의 경기였는데 심판을 볼 사람이 없어 내가 마스크를 썼다. 크리켓을 하던 선수들이 야구를 했는데, 룰을 몰라 삼진을 선언해도 말똥말똥 쳐다보고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먼 길을 돌아 처음 주심을 봤던 때로 돌아갔던 이규석은 그 이야기를 하면서 표정이 밝아졌다. 심판을 볼 때가 가장 행복한 이규석이다.

전문기자 marco@donga.com 트위터 @kimjongk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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