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공’ 이잖소… 108개의 실밥, 타고난 백팔번뇌… 인생같구나, 야구공의 생로병사

동아일보 입력 2012-05-29 03:00수정 2012-05-29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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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맞고 구르다 찢기고 뜯겨도
그대 즐겁다면 훨훨 날아가리
“알고보면 참… 속 깊은 놈이랍니다” 인생과 닮은 야구공의 탄생과정.’ 야구공은 단순한 듯 오묘한 존재다. 빨간색 코어를 굵기가 다른 양털 실로 두 차례 감고, 역시 다른 굵기의 면사로 두 차례 감아 공 모양을 만든다. 여기에 소가죽을 두른 뒤 빨간색 실로 매듭을 지으면 완성이다(왼쪽부터 차례로). 프로야구에 사용되는 야구공엔 한국야구위원회(KBO) 로고를 찍는다. 매듭의 개수는 백팔번뇌를 연상시키는 108개. 인생의 희로애락이 둘레 23cm 내외, 무게 145g의 야구공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2009년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KIA와 SK의 한국시리즈 7차전을 기억하시나요. 9회말 SK 투수 채병용의 손을 떠난 저를 KIA 나지완이 받아쳤지요. ‘딱∼’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저는 잠실구장의 밤하늘로 떠올랐습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니 양 팀 선수단은 물론이고 만원 관중의 눈이 저 하나만 바라보고 있더군요. 정말 황홀한 경험이었지요.

제가 왼쪽 스탠드에 내려앉는 순간 KIA 선수들은 서로 얼싸안고 난리가 났습니다. 반면 SK 선수들은 고개를 떨구더군요. 제 몸짓 하나에 이날 경기를 지켜본 수백만 명의 희비가 엇갈렸습니다.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야구공’입니다. 흔한 말로 저는 요즘 ‘대세’입니다. 저를 보러 매일 수만 명의 관중이 야구장을 찾죠. 얼마 전엔 역대 최소인 126경기 만에 200만 관중을 돌파했습니다. 김승연 한화 회장, 박용만 두산 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 등도 저를 보러 왔고요. 지난해에는 이명박 대통령 내외도 손자 손녀와 함께 야구장 나들이를 했지요. 쑥스러운 얘기지만 인기 그룹 ‘소녀시대’도 제 팬이라고 하네요.

몸무게가 145g밖에 되지 않는 저의 어떤 점이 이처럼 많은 사람을 웃기고 울리는 것일까요. 치명적인 저의 매력 속으로 한번 들어가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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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

하얀 가죽에 빨간 매듭을 지은 단순한 겉모습과 달리 저는 무척 속이 깊답니다. 가장 안 쪽에는 코르크와 특수고무로 이뤄진 코어가 있습니다.

방망이에 부딪칠 때 딱∼ 소리가 나는 건 바로 이 코르크 때문입니다. 또 고무로 인해 반발력이 생기죠. 여기서 중요한 게 고무의 배합입니다. 너무 많이 넣으면 공이 너무 잘 튀고, 적게 넣으면 잘 날아가지 않지요. 요즘 일본 프로야구에선 ‘날지 않는 공’ 때문에 말이 많죠. 반발력이 잘 생기지 않도록 고무를 배합했기 때문입니다.

코어는 양털 실로 감싸 둥그렇게 만듭니다. 프로야구에서 사용하는 공은 양털 함유량이 90% 이상이어야 합니다. 양털실을 감은 뒤엔 소가죽을 씌워 공 모양을 만들죠. 여기까지의 공정은 모두 기계로 이뤄집니다.

하지만 소가죽을 꿰매 매듭을 만드는 작업만은 사람의 손이 필요합니다. 기계로는 매듭의 간격과 높이 등을 일정하게 맞출 수가 없기 때문이죠.

그런데 그거 아시나요. 제 몸의 매듭은 정확하게 108개로 이뤄져 있습니다. 왠지 ‘백팔번뇌(百八煩惱)’가 연상되지 않나요. 그래서 흔히 야구가 인생에 비유되는 게 아닐까 합니다. 108개의 매듭은 야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죠. 투수들은 직구 외에도 슬라이더 커브 체인지업 포크볼 등 다양한 변화구를 던지는데요. 투수의 손을 떠난 공이 이처럼 다양한 변화를 일으키는 건 바로 이 매듭 때문입니다. 매듭이 공기의 저항을 어떻게 받느냐에 따라 움직임이 달라지거든요.

●로


이렇게 태어난 저는 각 팀의 주문에 따라 경기장으로 보내집니다. 프로야구에 사용되는 공은 한국야구위원회(KBO)의 로고가 찍혀 있죠. 현재 스카이라인과 빅라인, 맥스 등 3개 업체가 NC를 포함한 9개 구단에 경기용 공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팀마다 차이가 있지만 각 팀은 연간 3만 개 내외의 공을 사용합니다. 프로야구 구단만 계산해도 연간 약 30만 개의 공을 쓰는 셈이지요. 제 기억에 유독 강하게 남아 있는 분은 김성근 고양 원더스 감독입니다.

김 감독은 2007년부터 지난해 중반까지 SK 지휘봉을 잡았는데요. 그분이 ‘지옥 훈련’으로 유명한 건 다들 아시죠. 훈련을 많이 하니 저를 더욱 많이 필요로 했지요. 다른 팀이 3만 개를 쓸 때 SK는 4만 개로도 부족했습니다. 아침 먹고 훈련, 점심 먹고 훈련, 저녁 먹고 훈련, 심지어는 경기 끝나고도 훈련을 했거든요. 가끔 선수들의 수비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는 직접 펑고(수비 연습을 위해 배트로 공을 쳐 주는 것)를 하기도 하셨죠. 저, 정말 많이 아팠습니다.

●병


프로야구 한 경기에 사용되는 공은 100∼120개입니다. 이 가운데 경기가 끝난 뒤 수거되는 공은 절반 정도죠. 나머지 반은 팬들이 가져갑니다. 제가 홈런이나 파울 등으로 관중석에 떨어졌을 때 주워 가는 것이죠.

이런 공은 복 받은 친구들입니다. 공을 주운 팬들이 무척 소중하게 생각하거든요. 저희는 특히 롯데 경기를 좋아합니다. 롯데 팬들 사이에 ‘아주라 응원’이란 게 있기 때문입니다. 롯데 관중석에 파울볼이 떨어졌을 때 어른이 공을 잡으면 롯데 팬들은 입을 모아 “아주라”를 외칩니다. 경상도 사투리로 ‘아이에게 공을 주라’는 뜻으로 애정 어린 강요인 셈이죠. 공을 건네받은 어린이 팬의 환한 얼굴을 보는 건 더할 수 없는 기쁨이랍니다.

야구 관계자들에 의해 수거된 공들은 재활용 과정을 거칩니다. 경기에서 한 번 사용된 공은 거의 새 공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 공들은 경기 전 타자들의 감을 살려주기 위한 배팅볼로 쓰이죠.

배팅볼을 많이 쳐 낡으면 실내연습장의 티(tee) 배팅장으로 이동합니다. 주로 실내에 머물지만 비가 오거나 궂은 날씨일 때는 다시 야외의 신선한 공기를 맡기도 해요. 그런 날에 새 공을 쓰는 건 아깝기 때문이랍니다. 저희 가운데 몇몇은 미국이나 일본으로 해외여행을 떠나기도 합니다. 각 팀의 스프링캠프나 마무리 캠프에 따라가거든요.

●사


경기용→배팅볼용→티배팅용을 거친 저희들은 말 그대로 만신창이가 됩니다. 하지만 아마추어나 사회인 야구 선수들에게 KBO 마크가 찍힌 저희는 여전히 귀하신 몸입니다.

프로 구단들은 자신들이 쓸 수 없는 공들을 따로 모아 지역 내 고교나 대학 야구팀에 보내곤 합니다. 너무 많이 써 매듭이 풀리고 실밥이 터진 공이지만 어린 선수들은 정성스레 저희를 꿰매 다시 씁니다. 어린 선수들의 손길은 어찌 그리 따뜻한지요.

또 저희 중 일부는 캄보디아나 베트남같이 공이 귀한 나라로 기부되기도 합니다. 쿠바로 간 친구들도 있답니다. 몇 해 전 아마 최강인 쿠바 선수들이 친선 경기를 위해 우리나라에 왔을 때 경기 후 낡았다고 버림받았던 저희들을 대거 챙겨갔다고 해요.

국내건 해외건 저희는 방망이에 맞고 흙바닥에 긁히기 일쑤죠. 하지만 이 또한 저희들의 기쁨입니다. 저희를 통해 실력이 좋아진 선수들이 멋진 플레이로 팬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거든요. 끝으로 메이저리그의 전설적인 포수 요기 베라의 명언을 빌려 제 이야기를 마칠까 합니다. “야구공의 인생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야구#야구공#야구공의 생로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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