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AG스타] “자장면 먹는맛에 3관왕 들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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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11월 16일 07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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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무후무한 아시안게임 역도 3관왕의 주인공 원신희 한국체대 교수가 광저우아시안게임 개막 직전 역도장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박화용 기자 inphoto@donga.com
전무후무한 아시안게임 역도 3관왕의 주인공 원신희 한국체대 교수가 광저우아시안게임 개막 직전 역도장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박화용 기자 inphoto@donga.com
전무후무하다. 아시안게임에서 역도 3관왕의 영예를 안은 전설의 역사(力士)가 있다. 1974년 테헤란아시안게임 역도 라이트급에서 인상 130kg, 용상 165kg, 합계 295kg을 들어올려 금메달 3개를 목에 걸었다.

한국인으로는 아시안게임 출전 사상 첫 3관왕이었다. 당시 불꽃 튀었던 남북대결에서도 금메달 16개로 15개의 북한을 1개차로 제치고 종합 4위를 달성하는데 현격한 공을 세웠다. 이 모든 기록의 주인공은 대한역도연맹 원신희(63·한체대 교수) 부회장이다. 광저우아시안게임 개막을 앞두고 한체대 역도장에서 만난 원 교수는 “꽤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 그때 일이 마치 어제처럼 생생하다”며 입을 열었다.

배고팠던 시절 시멘트 들며 힘자랑
자장면·고기 먹을수 있어 역도 입문
13년간 한국新 30번이나 갈아치워
무릎부상 딛고 전무후무 AG 3관왕

자기관리만 철저하면 후배들도 금!

○힘자랑하려고 시멘트역기 들던 어린시절


원 교수가 역도를 처음 접한 건 중학교 때였다. 원 교수의 형은 하교하던 동생을 불러 자신이 다니던 고등학교에서 하나밖에 없던 150kg짜리 역기를 들게 했다. 힘으로는 동네에서 빠지지 않던 원 교수도 이상하게 오기가 발동했다. 그렇게 처음으로 잡은 역기가 그의 인생을 통째로 바꿔버렸다.

원 교수는 이후 역도의 매력에 빠졌다. 하지만 먹고 살기도 빠듯했던 시절, 비싼 역기는 언감생심이었다. 아니, 구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못했다. 어머니가 쓰다버린 둥근 체에 모래와 시멘트를 섞어 채우고 가운데 구멍을 뚫어 역기를 만들었다. “시골에 뭐 있나요. 시멘트로 역기 비슷하게 만들어서 드는 거였죠. 동네에서 힘자랑 하는 수준이었어요.” 원 교수는 고등학교 때부터 본격적으로 역도를 시작했다.

대전공업고등학교에 마침 역도부가 있었다. 그러나 ‘반드시 훌륭한 역사가 되겠다’는 마음으로 운동을 한 건 아니었다. 그저 “역도부에서는 자장면을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기를 먹으면 신기록 세우는 날”이었다고 한다. 이유야 어쨌든 그렇게 시작한 역도에서 원 교수는 재능을 꽃피웠다. 기록을 깨는 재미에 푹 빠지게 된 이후에는 13년간 30번이나 한국기록을 갈아 치우는 역사로 빠르게 성장해나갔다.

○갑작스러운 무릎부상으로 은퇴까지 고려

원 교수는 타고난 체격 때문인지 그 흔한 허리부상 한 번 당하지 않았다. 하지만 67년 대표팀에서 훈련하던 도중 한 선배와 장난을 치다가 역기에 눌려 그만 무릎이 탈골되고 말았다. 탈골은 상태가 호전될 뿐 완치되지는 않는다. 스스로 재활프로그램을 만들어 훈련량을 조절했지만 2년 뒤 스쿼트운동을 하다가 또다시 무릎을 다치고 말았다. 1972년 뮌헨올림픽에서 인상과 용상에서는 좋은 성적을 거눴지만 추상에서 실패해 7위에 머문 이유다.

원 교수는 “지금에야 밝히지만 뮌헨올림픽을 마지막으로 추상이 폐지되지 않았더라면 은퇴했을 것”이라고 고백했다. 추상(프레스)은 용상과 마찬가지로 2번에 나눠 드는 역법이다. 파워크린 후 연속동작으로 팔을 완전히 뻗어 바벨을 머리위로 들어 올려야 한다. 크린 후에는 다리를 움직여서는 안 된다. 자연히 무릎에 무리가 간다. 결국 추상에서 10kg이나 기록이 떨어졌고 은퇴를 심각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73년 쿠바세계선수권대회부터 추상이 사라지지 않았다면 역사에 길이 남을 아시안게임 역도 3관왕은 탄생하지 못할 뻔했다.

1974년 테헤란아시안게임에서 역기를 힘껏 들어올리고 있는 원신희(왼쪽).역도 3관왕이라는 위업을 달성한 뒤 카퍼레이드를 펼치고 있다. 사진제공 | 원신희
1974년 테헤란아시안게임에서 역기를 힘껏 들어올리고 있는 원신희(왼쪽).역도 3관왕이라는 위업을 달성한 뒤 카퍼레이드를 펼치고 있다. 사진제공 | 원신희


○테헤란아시안게임서 北과 치열한 신경전

74년 테헤란아시안게임 때도 원 교수의 무릎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여기에 복병까지 나타났다. 북한이 처음으로 대회에 참가하게 되면서 남북대결에 모든 이들의 이목이 집중된 것이다. 우리 선수들 사이에서는 자연스럽게 ‘북한에 지면 절대 안된다’는 분위기가 형성됐고, 남한에 지면 안되는 건 북한 선수들도 마찬가지였다. 원 교수에 따르면 북한 코칭스태프가 남한선수들에게는 인사조차 못하게 했을 정도로 신경전이 팽팽했다.

여기서 원 교수가 공개한 비화 하나. 역도는 같은 무게를 들면 저체중 선수에게 가중치가 주어진다. 몸무게도 하나의 전략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실제 역도선수들의 체중을 잴 때는 비공개로 진행된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당시 북한 코칭스태프가 원 교수의 체중을 알아냈다. 북한이 가장 유력한 금메달 후보를 이기기 위해 팀 선수의 체중을 원 교수보다 더 줄이는 작전을 펼친 것이다.

그러나 이 전략이 오히려 독이 됐다. 북한 선수는 무리하게 체중감량을 하다가 자신의 기록조차 내지 못한 채 고개를 숙였고, 원 교수는 페이스를 잘 유지하면서 3관왕이라는 위업을 달성했다. “재미있는 게 80년대였나. 한 국제대회에서 그때 그 북한선수를 만났어요. 어색하다면 어색할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서로를 보자마자 웃고 말았죠. 그때는 허물없이 지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서로 인사도 잘 하고. 나중에는 청바지도 선물하고 그랬다니까요.”

○후배들을 향한 애정 어린 조언

원 교수에게 출전했던 수많은 대회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를 묻자 역시 “테헤란”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본인에게도 아시안게임 3관왕은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역도국가대표팀이 광저우로 출발하기 전에도 태릉선수촌을 찾았다. 그리고 후배들을 향해 “역도는 다른 누구, 어떤 나라도 아닌 자신과의 싸움이니 잘 이기라”는 애정 어린 조언을 건넸다.

“어느 종목이나 마찬가지지만 컨디션 조절이 가장 중요해요. 금메달은 자기관리를 얼마나 잘 했느냐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요. 경기 당일에 컨디션이 안 좋아서 못 했다? 그건 핑계예요. 경기 당일에도 스스로를 컨트롤할 줄 아는 선수가 금메달을 딸 자격이 있는 겁니다. 장미란, 사재혁을 보세요. 자기관리가 얼마나 철저한데요.”

홍재현 기자 hong92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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