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필드선 이런일이…] 싸구려 목장갑의 효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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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2월 28일 17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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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 JNA
사진제공 | JNA
목장갑의 용도는 어디까지일까?

작업용으로 쓰는 목장갑이 필드에서 무한의 능력을 발휘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화제다.

라운드 중 날씨가 추워지면 가장 먼저 반응이 시작되는 부위가 귀와 손이다. 찬 바람에 금세 귀가 빨갛게 달아오르거나 손이 꽁꽁 얼어 스윙에 지장을 준다. 경기에 나서는 선수들은 갑작스럽게 돌변하는 날씨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비옷이나 털모자, 털장갑 등을 준비해 둔다. 행여 선수가 준비하지 않더라도 용품을 지원해주는 회사에서 여분을 갖고 다녀 큰 불편함은 없다.

지난 4월, 제주 핀크스 골프장에서 열린 발렌타인 챔피언십에서는 때 아닌 강추위에 선수들이 발을 동동 굴렀다.

1라운드에서는 비교적 날씨가 좋았지만 3,4라운드 들어 갑자기 기온이 떨어지고 강한 바람이 불어와 꽤 애를 먹었다.

4월의 따뜻한 제주도 날씨만 생각했다가 낭패를 본 것이다.

특히 이 대회는 유럽과 아시안투어 선수들이 대거 출전하면서 제주도의 변화무쌍한 날씨에 대비하지 못한 선수들이 많았다. 용품회사들도 이것저것 챙긴다고 챙겨왔지만 날씨에 대비는 크게 하지 못했다.

선수와 지원팀은 우왕좌왕하며 다른 방법을 찾아 고심했다.

태국 출신의 통차이 자이디는 유독 추위에 약하다. 자이디 역시 미처 방한용품을 챙겨 오지 못해 급하게 투어밴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선 자이디와 캐디는 담당자를 향해 몸짓과 손짓을 섞어가며 말했다.

“털장갑 있어요?”

“아뇨, 우리도 준비해 온 게 없는데 어떡하죠.”

“어디서 구할 방법은 없을까요?”

“잠시만 기다려 보세요.”

없는 것 빼고는 다 갖춰 놓은 투어밴에도 털장갑만은 없었다. 선수의 요청에 다급해진 담당자는 다른 투어밴을 뒤져가며 장갑 구하기에 나섰지만 사정은 다른 곳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중 우연히 작업 때 쓰려고 사온 빨간색 목장갑을 발견했다.

“자이디, 이것 밖에 없는데 괜찮을까요?”

울며 겨자 먹기로 자이디와 캐디는 목장갑 두 켤레를 받아들고 투어밴을 빠져나갔다. 그런데 보기에는 우스꽝스러워 보일 목장갑의 효과는 예상외로 컸다. 막 쓰기 편하고, 착용하기도 불편하지 않아 라운드 때 쓰기엔 제격이었다.

자이디는 이 대회에서 강성훈과 연장 접전을 펼친 끝에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목장갑이 우승에 지대한 공을 세운 건 아니지만 원래의 목적 이상의 성능을 발휘한 건 사실이다.

자이디에게 싸구려 목장갑은 몇 만 원짜리 골프장갑보다 훨씬 더 고마운 존재가 됐을 게 분명하다. 우승컵과 함께 목장갑도 고향인 태국으로 가져가지 않았을지 궁금하다. 캘러웨이골프 이태희 팀장은 “그날 자이디에게 목장갑을 준 게 미안했었는데, 우승까지 했으니 제가 할 도리는 다 한 것 같아요”라며 환하게 웃었다.

주영로 기자 na1872@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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