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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9년 2월 5일 02시 4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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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원주시에 인공 빙벽 판대 아이스 월(Ice Wall)이 생겼을 때 그것은 ‘콜럼버스의 달걀’이었다.
겨울 등반의 꽃으로 일컬어지는 빙벽 등반은 폭포가 얼어붙은 빙폭(氷瀑)에서 행해진다. 그러나 빙폭은 보통 산속 깊이 있기 마련이어서 접근하기 어려운 게 골치였다.
강원 춘천시 강촌 구곡폭포나 경기 양주시 가래비폭포처럼 가까운 곳은 등반가가 많이 몰려 시장판을 방불케 했다. 등반가가 떨어뜨리는 얼음덩이(낙빙)도 위험했지만 위에서 추락이라도 하면 밑에서 오르던 사람들은 낭패를 당할 수밖에 없었다.
해외 산악 전문지가 ‘한국의 독특한 등반 문화’라며 빙폭에 다닥다닥 매달린 사람들의 사진을 토픽으로 대서특필했을 정도.
이때 원주 클라이머스 삼총사로 불리는 김순봉(46) 전양표(45) 서강호(44) 씨는 폭포를 만들겠다는 ‘무모한 생각’을 했다. 암벽 꼭대기까지 호스를 연결해 모터 펌프로 물을 계속 흘려 빙폭을 만든다는 아이디어였다.
○ ‘무모한 시도’ 우려 씻고 성공
200m 공급관 결빙우려 밤샘 점검
2001년 겨울 간현 유원지의 10m 암벽에 호스를 설치한 실험은 대성공이었다. 사흘 만에 튼실한 얼음기둥이 생겨난 것이다. 이듬해 이들은 미리 점찍어둔 판대리 삼산천변 절벽 꼭대기에서 물을 흘려 무려 103m의 거대 빙폭을 탄생시켰다.
그것은 콜럼버스가 달걀 모서리를 살짝 깨서 테이블 위에 세운 것과 같았다. 도로에서 불과 150m 거리의 거대 빙폭은 단번에 전국 빙벽 등반가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물론 인공 빙벽을 만드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삼산천에서 퍼 올린 물을 암벽 꼭대기로 이동시켜 주는 200m에 이르는 호스가 얼지 않도록 호스 길이만큼의 열선을 장치한 뒤 다시 보온재로 꽁꽁 감싸야 했다.
“호스가 긴 데다 절벽에 설치돼 있어서 한 번 얼면 대공사를 해야 합니다. 밤에도 산악회원들이 교대로 숙직하면서 급수 시스템을 점검해야 해요.”(김순봉 씨)
인공 빙벽이지만 자연 폭포가 그렇듯 물을 계속 흘려줘야 한다. 얼음 표면에 습기가 적당히 공급돼야 날카로운 아이젠(신발에 부착하는 등반 장비)과 아이스바일(손도끼처럼 생긴 등반 장비)의 타격에도 얼음이 잘 깨지지 않아 안전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입소문 타고 클라이머-관광객 북적 지자체 벤치마킹으로 이어져
펌프와 열선을 가동시키느라 사용하는 전기료 수백만 원은 산악회원들이 추렴했다. 등반은 당연히 무료. 그러나 빙벽 유지비를 이해하는 산악인들은 기금을 모으고 숙직을 대신하기도 했다.
판대 빙벽은 탄생도 비범했지만 운영 시스템도 첨단이다. 예약제와 함께 등반인원 총량제를 실시하고 있다.
“처음엔 시비가 생기기도 했지만 낙빙 등 사고를 막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어요. 이젠 시스템이 완전히 자리를 잡았습니다.”(서강호 씨)
유명 빙벽등반대회가 판대에서 줄줄이 열렸다. 특히 갤러리가 경기를 관전하기 좋다는 점이 후원사들을 유혹해 갈수록 대회 규모는 커졌다.
해가 갈수록 노하우가 쌓여 빙벽의 난이도를 원하는 대로 만들 수 있게 됐다. 통상 고드름 제작이 어려운데 흘려보내는 물길을 정밀하게 조정해 고드름의 크기와 개수까지 제어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한 것이다.
판대 빙벽은 중앙선 기차 승객들도 볼 수 있는 위치여서 입소문이 나면서 관광객들을 끌어모았다. 거대한 얼음벽도 볼거리였지만 아이스바일과 아이젠으로 얼음을 찍어 까마득한 높이까지 오르는 아이스 클라이머 자체도 구경거리였던 것이다.
판대의 성공에 자극받은 지방자치단체들의 벤치마킹이 이어져 충북 영동, 단양군, 경북 청송군, 의성군, 강원 화천군 등지에 인공 빙벽이 속속 등장했다. 현재 전국의 인공 빙벽은 10여 개. 내년엔 20개를 훌쩍 넘을 것으로 전망된다.
올해 들어서는 조명시설이 마련된 빙벽이 크게 늘었다. 예약이 꽉 차 낮에 등반하지 못한 사람들이 야간에 등반할 수 있도록.
익스트림스포츠 칼럼니스트 송철웅
blog.naver.com/timbersmith
▼2월말 수십명이 반나체로 빙벽타기 장관 연출▼
판대 빙벽에서는 등반 시즌 끝물인 2월 말에 열리는 독특한 연례행사가 있다. 반바지 외엔 몸에 걸친 것을 모두 벗어던진 채 빙벽에 매달리는 ‘누드 아이스 클라이밍’.
등반가 수십 명이 나체에 가까운 차림으로 동시에 얼음벽을 기어오르는 장관이 연출된다. 해마다 나체 등반에 참가해온 서강호 씨는 “아이스바일을 찍을 때 쪼개져 나오는 얼음조각들이 맨살에 닿을 때의 차갑고도 산뜻한 감촉은 시즌이 끝나는 아쉬움을 달래주기에 충분하다”고 말했다.
빙벽 등반을 가르치는 곳은 한국등산학교(www.alpineschool.or.kr), 코오롱 등산학교(www.mountaineering.co.kr), 한국산악회 등산학교(www.cac.or.kr), 정승권 등산학교(www.climbingschool.co.kr), 김용기 등산학교(www.kimcs.com), 권기열 등산학교(www.rocknice.co.kr)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