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살았다”한국축구 예선 마지막 경기 印尼에 1-0 진땀승

  • 입력 2007년 7월 19일 03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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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축구가 천신만고 끝에 수렁에서 살아 나왔다.

2007 아시안컵 축구대회에 출전 중인 한국축구대표팀이 극적으로 8강에 진출했다. D조 최하위였던 한국은 조 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인도네시아를 1-0으로 꺾고 사우디아라비아에 이어 조 2위(1승 1무 1패·승점 4)로 8강 토너먼트 티켓을 거머쥐었다.

8만8000여 명의 광적인 팬들이 들어찬 18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겔로라 붕카르노 경기장. 귀청을 찢는 듯한 함성과 일방적인 응원, 파울과 태클이 난무하는 거친 경기 속에서 이천수가 상대 골문 앞에서 공을 잡았다. 넘어질 듯 넘어질 듯 위태로운 드리블 속에 어느덧 상대 수비수 3명을 제친 이천수가 오른쪽으로 슬쩍 공을 밀어 주었다. 대회 직전부터 허벅지 부상에 시달렸던 미드필더 김정우가 이를 강력한 중거리슛으로 연결했다. 대포알 같은 슈팅은 그물을 크게 흔들었고 함성으로 떠나갈 듯하던 경기장은 일순 침묵에 잠겼다.

전반 34분. 한국의 선제 결승골이었다.

한국은 이전 경기까지 1무 1패를 기록하며 조 최하위인 상태에서 마지막 경기에 나섰다. 지거나 비기면 무조건 탈락하는 상황이었다. 또 인도네시아를 이기더라도 같은 시간에 벌어지는 사우디아라비아-바레인의 경기가 무승부가 되면 무조건 탈락하는 상황이었다.

희소식은 먼저 다른 경기장에서 들려왔다. 전반 18분 만에 사우디아라비아의 아메드 알 무사가 선제골을 넣은 것. 만에 하나 두 팀이 비겨 이기고도 탈락하는 상황을 염려했던 한국에는 기쁜 소식이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이후 3골을 더 넣어 바레인을 4-0으로 완파하고 조 1위를 확정지었다.

선제골을 넣은 한국은 후반 들어 이천수가 골키퍼와 일대일 상황에 맞서는 등 몇 차례 득점 찬스를 더 잡았으나 추가득점을 하지는 못했다.

전 국민적인 응원을 등에 업은 인도네시아는 사력을 다해 반격을 가했다. 한국은 후반 32분 수비 진영에서 백패스를 하다 아찔한 광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인도네시아 팬들은 경기 종료 5분여 전부터 전 관중이 하나가 되어 응원가를 부르며 자국 선수들을 응원했다. 한국은 선수들이 지쳐 쓰러져 가던 인저리타임 때까지 계속되는 인도네시아의 파상공격을 막아냈고 결국 길게 휘슬이 울렸다.

격렬한 비판 속에서 감독 사퇴 논의까지 일며 비난을 받았던 한국 축구가 지옥에서 간신히 빠져나오는 순간이었다.

이날 승리로 한국은 C조 1위로 올라온 이란(2승 1무)과 22일 오후 7시 20분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4강 진출 티켓을 놓고 대결하게 됐다. 한국은 1996년 아랍에미리트 대회 이후 아시안컵에서 4개 대회 연속 이란과 8강전을 벌이게 됐다. 한국은 이란과 역대 전적 8승 4무 8패를 기록 중이다.

자카르타=이원홍 기자 bluesky@donga.com

▽D조 최종 순위표
순위승점
사우디아라비아210727
한국111334
인도네시아102343
바레인102373

▼입장 못한 印尼 축구팬 수천명 격렬 항의▼

○…경기가 시작되기 며칠 전부터 표를 사기 위해 수백 m씩 줄을 서서 기다렸던 일부 시민들이 끝내 표를 구하지 못하자 겔로라 붕카르노 경기장 주변 철망을 뛰어넘으려 매달리는 등 소동이 발생했다. 입장하지 못한 수천 명의 인도네시아 축구팬들은 운동장 외곽을 둘러싼 철망 너머로 물병과 휴지조각 등을 집어 던지며 격렬하게 항의했다. 한국 교민들은 만일의 사태를 우려해 이날 경기장을 찾지 말자는 분위기였고, 경기장을 찾더라도 전반전만 보고 돌아가자는 등 마찰을 염려해 당초 예상보다 훨씬 적은 수백 명만이 경기장을 찾았다.

○…8만8000여 관중석이 꽉 찬 붕카르노 경기장은 흰옷과 붉은 옷이 뒤섞인 인도네시아 팬들의 광적인 함성으로 가득 찼다. 인도네시아 응원단은 평소 붉은 옷을 입고 응원을 했는데 이날은 한국팀이 붉은 유니폼을 입는 데다 한국의 ‘붉은 악마’ 응원단과 차별화하기 위해 흰옷을 입기로 했다고. 붉은 옷 응원단에 익숙한 한국 선수단에 힘을 실어줄지도 모른다고 판단한 것. 그러나 행동 통일이 안 돼 관중석은 흰옷과 붉은 옷이 뒤섞인 풍경.

자카르타=이원홍 기자 bluesky@donga.com

▼한숨 돌린 베어벡 “I am happy”▼

“행복합니다(I am happy).”

의미심장한 한마디였다. 경기를 마친 한국축구대표팀의 핌 베어벡(사진) 감독의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경기 도중 극도로 경직됐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그는 경기 직전까지 사퇴 논의로 압박을 받고 있었다. 8강 진출에 실패할 경우 경질 논의가 본격화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 자신이 대회 전부터 “4강 진출에 실패하면 감독직 사퇴를 고려하겠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는 바레인전 패배 직후 거취에 관한 질문을 받고 “8강 진출에만 집중하겠다”고 말했다. 표정은 담담했으나 당시 현장에 있던 인도네시아 기자들은 “베어벡 감독이 매우 감정적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아무리 태연하려 해도 그가 속으로는 초조해하고 있다는 걸 누구나 알고 있었다. 여기에 선수 장악 능력이 떨어진다는 등 감독 자질론도 불거져 나왔고 이동국과의 불화설도 터져 나와 대표팀 분위기도 어수선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인도네시아전의 극적인 승리는 그에게 한숨 돌릴 여유를 주었다. 그는 인도네시아전이 끝난 후 “한국에서 일어나는 모든 여론을 다 알고 일일이 대응할 수는 없었다”고 입을 뗐다. 그는 “결과가 안 좋을 때 비난 여론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다. 그건 지도자로서 감수해야만 하는 것이다”라며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은 감독의 숙명이라는 것을 받아들였다.

이동국에 대해서는 “이동국 선수와 알고 지낸 지도 6년이 넘었다. 경기 전 이동국 선수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동국 선수의 도움이 많이 필요하다는 것을 얘기했다”고 말했다.

베어벡 감독은 “남은 모든 경기에서 승리해 우승하겠다”고 다시 한번 다짐했다. ‘비 온 뒤 땅이 굳어진다’는 말처럼 남은 경기에서 좋은 결과가 있다면 그의 입지는 다져질 것이다. 그러나 내용이 좋지 않다면 사퇴 논의는 다시 불거질 듯하다. 강호들과의 남은 일정은 험난하다. 이제 그는 더 큰 시험대에 올랐다.

자카르타=이원홍 기자 bluesk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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