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육상 대구, 도전의 발자취

  • 입력 2007년 3월 27일 22시 2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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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구벌' 대구가 세계육상선수권대회(이하 세계육상) 개최의 꿈을 처음 키우기 시작한 것은 3년 반 전인 2003년 8월 대구 하계유니버시아드 때였다.

북한의 미녀 응원단이 내려와 한창 인기몰이를 하고 있을 때 당시 대구를 방문했던 자크 로게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은 대구 U대회 조직위에 한 마디의 '팁'을 줬다.

"유니버시아드를 이 정도 수준으로 개최할 수 있다면 세계육상에도 한 번 도전해보라."

당시만 해도 꿈같던 얘기였다.

한국은 이전까지 하계올림픽과 월드컵축구를 성공적으로 개최했지만 세계육상은 한 번도 도전해보지 못한, 또 쉽게 도전할 엄두조차 내보지 못한 '벽'이었다.

대구시는 2002년 월드컵축구와 유니버시아드를 개최한 뒤 인프라와 운영 능력에 관한 한 세계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을 자신감이 붙었다. 이런 자신감이 대구의 도전을 가능케 한 밑바탕이 됐다.

2004년 상반기 대구는 드디어 시동을 걸었다.

그 해 가을과 겨울에 열린 월드어슬레틱스파이널과 국제육상경기연맹(IAAF) 집행이사회에 대표단을 파견하면서 서서히 세계의 벽을 두드려보기 시작했다.

이어 정부 차원에서 대회 유치 타당성 조사가 실시되고 국회에서 2011년 대구 세계육상 유치 지지 결의안이 채택되자 달구벌의 걸음은 빨라지기 시작했다.

대구는 2005년 6월 마침내 유치위 창립 총회를 열어 외무장관을 지낸 정통 외교관료 출신의 유종하 유치위원장 체제를 출범시켰다.

이어 지난 해 3월31일 모나코 IAAF 본부에 정식으로 유치 의향서를 제출해 유치전에 뛰어들었다.

당시만 해도 세계육상은 전례없는 거대 도시들의 경쟁으로 대구가 견뎌내기 힘들 것 같은 틈바구니였다.

이번에 유치전에서 맞붙은 모스크바(러시아), 브리즈번(호주), 바르셀로나(스페인) 외에도 카사블랑카(모로코), 예테보리(스웨덴), 두바이(아랍에미리트연합.UAE),미국 등 8~9개 도시가 경합하고 있었다.

그러던 상황에서 몇 개 도시는 과잉 경쟁에 지쳐 자연스럽게 떨어져 나갔다.

대구는 끝까지 뚝심을 발휘하며 '골리앗과의 싸움'을 준비했다.

2005년과 2006년 대구국제육상대회는 자신감을 더 강화하고 IAAF 집행이사들에게 대구의 '실전 능력'을 보여준 기회였다.

'미녀새' 옐레나 이신바예바와 '황색탄환' 류시앙이 이 대회에 출전하면서 대구국제육상의 인지도는 세계적인 수준으로 올라갔다.

IAAF는 2006년 대구국제육상대회를 준비하고 있던 유치위에 뜻밖의 통지를 보냈다. 한 번에 한 차례씩 개최지를 정하던 관행과 달리 2011년과 2013년 개최지를 패키지로 동시에 결정한다는 것이었다.

대구 유치위는 더욱 바쁘게 움직였고 400여 쪽에 달하는 공식 유치 신청서를 만들어 다시 IAAF 모나코 본부로 날아갔다. 작년 12월1일 대구는 공식 후보 도시 지위에 올랐다.

그 전까지 유종하 위원장은 지구를 세 바퀴 반이나 도는 여정을 하며 20여개국을 방문해 집행이사들을 대면 접촉했다. 각국에 주재한 외교 공관도 직간접적으로 지원 사격을 가했다.

이어 지난 달 22-25일 대구가 처음 '수능시험'을 성공적으로 치러냈다.

헬무트 디겔 IAAF 부회장을 단장으로 한 실사단이 대구를 찾았고 첫 번째 감동 작전이 시작됐다.

대구 시민은 공항부터 5만여 명이 시내 곳곳을 '오케이, 대구!'의 함성으로 물들이며 경쟁 도시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풀뿌리 유치전'에 가세했다.

대구 경북 시민은 또 80여 만명이 직접 참여한 대회 참관 확인 서명부를 만들어 집행이사회에 유치 열기의 '담보'를 제시했다.

이런 대구의 노력은 최종 프리젠테이션에서 재현된 두 번째 감동 작전으로 결실을 맺었다. 그리고 IAAF 집행이사회는 세계 유수의 도시들을 제쳐놓고 달구벌의 손을 힘차게 들어올렸다.

김동원기자 davis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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