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권호의 눈]‘무명’이 되레 무기였다

  • 입력 2004년 8월 27일 01시 2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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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전에서 맞붙은 적은 없지만 11년 후배인 정지현과는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함께 매트에서 뒹굴었던 사이다. 내가 1년 반 만에 복귀했던 2002년 부산아시아경기 대표 선발전 55kg급에서 그와 자웅을 겨룰 뻔도 했다.

아테네에 오기 직전까지 대표팀 트레이너를 한 4개월 동안 그를 지켜보면서 느꼈던 것은 뭐든 배울 자세가 돼 있고, 또 배운 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능력을 갖췄다는 점이었다. 대표팀 막내로 말수가 적고 내성적인 성격이 나와는 정반대지만 이게 큰 장점으로 작용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정지현에게 가르쳐준 것은 거창한 기술보다는 스탠딩에서 방어자세와 정신력의 중요성 이었다. 준결승까지 4경기에서 22점을 얻은 반면 실점은 3점에 그친 것을 보며 내 가르침을 100% 이상 소화해낸 정지현에게 감사했다. 정지현의 가장 큰 무기는 철저한 무명선수였다는 점이다. 그의 경력은 아시아선수권대회 우승이 전부다. 기존 강자들은 장단점이 모두 공개된 반면 정지현의 전력은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았던 것. 결국 상대 선수들은 쾌재를 부르다 큰 코 다친 셈이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첫판부터 강한 상대를 만나는 등 대진 운이 나빴던 것도 오히려 보약이 됐다. 세계 최강을 맞아 다른 선수 같으면 상대의 이름에 주눅이 들어 지레 겁을 냈겠지만 정지현은 고비였던 나자리안과의 준결승에서 머리로 그의 얼굴을 들이받으며 들어가는 등 저돌적인 자세로 돌풍의 주인공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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