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차례 걸쳐 54억 맡긴 피해자도
주식투자-쇼핑-자녀 유학비 등 탕진… 돌려막다 한계 이르자 파산 신청
1심 징역 7년 실형 선고받고 항소
지인 노린 사기범, 3년새 3.2배로
주부 김모 씨가 학부모 모임에서 만난 고모 씨(55)에게 투자금을 맡기기 시작한 건 2016년 5월이었다. 유명 증권사에 다니는 사촌 오빠가 월 4%의 수익을 내준다는 말에도 혹했지만, 두 사람의 자녀가 초등학교와 고등학교를 같이 다닌 사이이기에 그는 고 씨를 더욱 신뢰했다. 수익금이 꼬박꼬박 입금되자 김 씨는 남편과 딸의 통장까지 털어 8년간 총 32억 원을 보냈다. 하지만 고 씨에겐 금융권에 재직하는 사촌이 없었고, 김 씨에게서 받은 돈 중 약 12억 원은 포르셰를 몰며 백화점 VIP 생활을 즐기는 데 탕진한 상태였다.
● 학부모 모임까지 뻗친 ‘투자 사기’ 마수
26일 법원 등에 따르면 서울북부지법 형사합의13부(부장판사 나상훈)는 9일 고 씨에게 징역 7년을 선고했다. 그는 2016년부터 2024년까지 서울 강북구와 성북구에서 자녀가 같은 학교에 다닌 학부모 14명을 속여 총 284억 원을 가로챈 혐의(특정경제범죄법상 사기, 유사수신)로 기소됐다.
법정에서 드러난 고 씨의 수법은 전형적인 돌려막기식 폰지 사기였다. 그는 초기엔 수익금을 꼬박꼬박 보내며 신뢰를 쌓았다. 다른 피해자는 173차례에 걸쳐 54억 원을 맡기기도 했다. 하지만 피해자들이 투자 수익인 줄 알았던 돈은 사실 다른 학부모에게서 뜯어낸 투자금이었다.
원금 중 상당액은 고 씨의 사치스러운 생활로 증발했다. 고 씨는 백화점 카드 대금으로만 26억7000만 원을 썼고, 아파트 분양(6억1000만 원)과 자녀 유학비(1억6000만 원)에 거액을 쏟아부었다. 월 400만 원 할부로 포르셰 차량을 구입했고, 연간 1억 원 이상을 쓰는 백화점 VIP 대접을 받으며 재력가 행세를 했다. 그는 이런 돌려막기가 한계에 이르며 사기 범행이 발각되자 파산을 신청했다.
피해자 대다수는 돈을 돌려받지 못했다. 그중 한 명은 남편이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재판부는 “투자 원금과 수익금을 지급할 의사나 능력이 없는데도 인적 신뢰 관계를 이용해 장기간에 걸쳐 돈을 편취했다”며 “죄질이 무겁고 비난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고 씨의 재산 상황에 비추어 추가 피해 복구를 기대하기는 어려워 중형 선고가 불가피하다”고 덧붙였다. 검찰은 징역 12년을 구형했으나 법원은 7년을 선고했다. 고 씨는 항소했으나 검찰은 항소하지 않아 2심에서는 형량이 줄어들 가능성이 있다.
● 지인 노린 사기범, 3년 새 3.2배로
고 씨처럼 지인을 상대로 한 사기는 증가하는 추세다. 대검찰청에 따르면 친구나 직장 동료, 이웃 등 지인을 상대로 사기를 벌인 피의자는 2021년 2만8930명에서 2024년 3.2배인 9만3795명으로 늘었다. 이런 면식범이 전체 사기 피의자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같은 기간 17.0%에서 41.0%로 늘었다.
투자 등을 미끼로 불법적으로 자금을 끌어모으는 유사수신 범죄도 급증하는 추세다. 경찰청에 따르면 유사수신 발생 건수는 2021년 489건에서 지난해 3.4배인 1642건으로 늘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유행 이후 증시의 변동성이 커지면서 투자에 대한 관심이 늘어난 영향으로 분석된다.
실제로 지난해 대구지법은 학부모 11명에게 주식 투자를 권하며 8억 원을 가로챈 혐의로 기소된 주부에게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했다. 2024년 인천지법은 상품권 투자로 고수익을 보장해 주겠다며 회원 69명에게 171억 원을 빼돌린 맘카페 운영자에 대해 징역 10년을 선고하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지인에 의한 투자 사기는 신뢰 관계를 이용하기 때문에 장기간에 걸쳐 큰 피해를 볼 수 있다고 우려한다. 특히 고 씨처럼 돌려막기 수법으로 수익금을 주는 척하면 나중엔 손실이 생겨도 투자 위험에 따른 책임이라고 우길 위험도 있다. 한국금융소비자보호재단은 “과도한 투자 수익률을 보장한다는 지인의 권유는 일단 의심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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