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권 광주요 도자문화재단 이사장이 23일 별세했다. 향년 89세. 조 이사장은 촉망받던 건축학도였지만 1967년 ‘동백림(동베를린) 사건’으로 월북한 뒤 30년간 유럽 등지에서 북한의 공작원으로 활동하다가 귀순해 도자기 연구에 여생을 바친 인물이다.
조 이사장은 재일교포 사업가 광호(廣湖) 조소수 선생(1912∼1988)의 아들이다. 일본 도쿄에서 태어난 그는 1945년 9월 귀국해 부여의 정림사지 석탑, 경주 불국사의 다보탑(국보 20호)을 보며 예술가의 꿈을 키웠다. 조 이사장은 1964년 당시 세계 최고라 불리던 프랑스 파리의 국립 보자르 건축학교 본과(本科) 진학시험에서 1200명 중 수석을 하면서 ‘전도유망한 건축학도’란 수식어를 얻었다.
조 이사장의 건축가 꿈은 이뤄지지 못했다. 1967년 7월 8일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동백림 사건’이 일어나면서 조 이사장이 월북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김형욱 당시 중앙정보부장은 ‘동백림을 거점으로 한 북괴 대남 적화공작단 사건 제1차 진상발표’를 위한 기자회견을 열었는데, 혐의자 명단에는 조 이사장의 이름도 있었다.
조 이사장이 북한과 연결된 건 동베를린에 있던 북한대사관이 보자르 건축학교 본과 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한 조 이사장에게 ‘축전(祝電)’을 보내오면서부터다. 당시 유럽 유학생들 사이에선 남한이든 북한이든 다 같은 ‘우리 민족’이라 여기는 경향이 강했다. 조 이사장도 큰 고민 없이 동베를린 북한대사관의 초청에 응했고 북한까지 다녀왔다.
북한 대사관 측은 중정의 조사를 눈치채고 조 이사장에게 몸을 피하라고 연락했다. 결국 그는 북한으로의 도피를 선택했다. 훗날 후회했지만 그땐 그게 자신과 가족을 지키는 유일한 길이라 믿었다. 그렇게 조 이사장은 일본인으로 위장해 유럽을 오가며 30년을 북한의 공작원으로 살다가 1997년 귀순했다.
귀순한 조 이사장은 1년 반가량 외부와 단절된 채 조사를 받고 1999년이 돼서야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됐다. 그는 건축에 대한 열망을 도자기를 통해 승화했다. 아버지가 경기 이천시에 만든 광주요에서 이사장을 맡아 도자기 연구에 여생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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