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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사회

눈 뜨고 전재산 빼앗기는 노인들…점심 사겠다는 조카 따라갔다 아파트 명의 넘어가

입력 2022-06-15 03:00업데이트 2022-06-15 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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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친인척에게 영문도 모른채… ‘경제적 학대’ 年평균 400명 넘어

이혼 후 전북에서 30년 넘게 혼자 살아온 이모 할머니(80)의 유일한 재산은 6500만 원짜리 아파트 한 채였다. 3년 전, 생전 왕래가 없던 50대 조카가 불쑥 찾아왔다. 할머니가 치매를 앓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접근한 조카는 1년 동안 주변을 맴돌며 할머니의 통장과 신분증, 인감도장을 챙겼다. 어느 날 조카는 “점심을 사 주겠다”며 할머니를 이끌고 법무사 사무실을 찾았다. 할머니는 영문도 모른 채 조카가 시키는 대로 했고, 아파트는 조카에게 넘어갔다.

평소 지척에서 할머니를 살피던 이웃의 신고로 지역 노인보호전문기관이 조사를 한 끝에 조카의 소행이 드러났다. 할머니는 기관의 도움으로 1년 전 아파트를 되찾았지만 아직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른다.

한국 노인들의 ‘지갑’이 위험하다. 조카의 행위는 노인학대, 그중에서도 노인 의사에 반해 재산이나 경제적 권리를 빼앗는 ‘경제적 학대’에 해당한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65세 이상 경제적 학대 피해자는 2016∼2020년 연평균 428명이다. 학대를 당해도 신고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 실제 피해자는 훨씬 더 많다.

한국에선 ‘부모 재산이 곧 자녀 재산’이라는 인식 때문에 경제적 학대가 쉽게 용인됐다. 하지만 국내 65세 이상 인구는 2029년 1252만 명으로, 2017년 대비 1.8배로 늘어난다. 초고령사회에 맞춰 경제적 학대에 대한 경각심과 예방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경제적 학대당한 노인 “자식 잘못 키운 내탓” 자책… 신고도 포기

가족간 재산범죄 처벌 힘든 제도… 전 세계서 한-일 두 나라만 유지
신고해도 형사처벌 쉽지 않아… 돈 요구 거절땐 폭행 등 2차 피해
가해자 78%가 친족, 아들이 최다… 부자보다 가난한 노인 피해 많아



‘평생 일군 재산을 한순간에 빼앗긴 분노. 남이 아닌 아들에게 재산을 빼앗겨 차마 고소할 수 없는 괴로움. 어긋난 아들에 대한 안타까움. 결국 아들을 이렇게 키운 게 자기 자신이라는 죄책감.’

70대 A 할머니가 최근 지역 노인보호전문기관 심리상담을 통해 토로한 감정 분석 내용이다. 치매 전 단계인 ‘경도인지장애’를 앓는 A 할머니는 지난해 12월 아들에게 경제적 학대를 당했다. 수시로 A 할머니의 통장에서 돈을 빼내 사용하던 아들은 어머니 명의의 집을 자기 명의로 바꾼 뒤 연락을 끊었다.

피해 노인들은 경제적 학대를 당해도 쉽게 신고하지 못한다. 신고를 해도 가해자 처벌로 이어지는 경우는 적다. 경제적 학대를 단순히 ‘노인 지갑에 손대는’ 행위로 치부하면 안 된다. 가정폭력 등 2차 피해를 유발하는 데다 빈곤 노인에겐 생존과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 신고 처벌 모두 어려운 경제적 학대

보건복지부 통계에 따르면 2020년 기준 경제적 학대 가해자 466명 중 361명(77.5%)이 피해자의 친족이었다. 이 중 아들이 205명으로 가장 많다. 친족 다음으로는 요양병원이나 요양원 등 노인 시설 및 기관 종사자가 61명(13.1%)으로 많았다.

피해 노인들은 가까운 사람에게 피해를 입을수록 신고하기를 꺼린다. 대구남부노인보호전문기관 관계자는 “대부분 노인들이 ‘내 가족이 한 짓’이란 생각에 신고를 망설인다”고 말했다. 주변에서 대신 신고하기도 쉽지 않다. 신체적 학대와 달리 피해 당사자가 털어놓지 않는 이상 타인이 알아채기 어렵기 때문이다.

설령 신고하더라도 처벌이 쉽지 않은 문제도 있다. 한국은 형법상 ‘친족상도례’ 원칙에 따라 가족 간의 재산범죄에 대해서는 처벌하지 않거나 고소해야 공소를 제기하도록 했다. 한 지역 노인보호전문기관 관계자는 “아들에게 경제적 학대를 당한 70대 노부부와 함께 경찰서를 찾았지만 ‘친족상도례 때문에 처벌이 어렵다’는 이야기를 듣고 돌아섰을 때 너무 허탈했다”고 전했다. 가족 간 재산범죄를 처벌하지 않는 제도는 전 세계에서 한국과 일본 두 나라에만 있다.

장애인 대상 재산범죄는 가해자에게 친족상도례 원칙을 적용하지 않도록 지난해 7월 장애인복지법이 개정됐다. 노인복지법에는 아직 이런 조항이 없다. 서울지방변호사회 인권위원회 위원인 이기연 변호사는 “경제적 학대 가해자에게는 친족상도례 원칙이 적용되지 않도록 법령과 해석을 정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 가정 폭력과 노인 유기로 악화

경제적 학대는 ‘2차 피해’를 낳는다. 우선 노인이 경제적 학대를 막는 과정에서 폭력이나 폭언 피해를 입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서울에 사는 70대 B 할아버지가 그랬다. B 할아버지는 아들의 거듭된 주식 투자 실패로 생긴 빚 3000만 원을 대신 갚아주는 등 적지 않은 도움을 줬다. 하지만 아들은 계속 돈을 요구하면서 B 할아버지의 귀중품을 몰래 갖다 팔기까지 했다. 돈을 주지 않으면 물건을 집어던지며 난동을 부렸고, 그때마다 B 할아버지는 두려움에 떨었다.

심한 경우 경제적 이득만 취하고 노인을 버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한 지역 노인보호전문기관 관계자는 “노인 방임이나 유기 신고가 접수돼 조사하다 보면 과거 경제적 학대 피해를 당한 경험이 발견된다”고 말했다.
○ ‘가난한 노인’이 더 위험

흔히 경제적 학대 피해자를 ‘부자 노인’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다. 사회복지사들과 학계 전문가들은 모두 “가난한 노인이 위험하다”고 말한다.

90대 C 할머니도 딸에게 그동안 모아둔 기초생활수급비를 모두 빼앗겼다. C 할머니는 매달 약 80만 원씩 받던 기초생활수급비의 일부를 저금해 500만 원가량을 모아뒀다. 하지만 수급비가 들어오는 계좌의 비밀번호를 알고 있던 딸은 지난해 어머니가 노환으로 병원에 입원하자 이를 모두 가로챘다.

서울남부노인보호전문기관의 김민철 과장은 “빈곤 노인이 경제적 학대 피해를 입으면 단순히 생활비를 잃는 것 이상”이라며 “생명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안전망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노인학대 피해를 신고하고 싶다면 노인보호전문기관 1577-1389, 보건복지상담센터 129, 경찰 112로 전화하세요. 보건복지부의 노인학대 신고 애플리케이션(앱)인 ‘나비새김(노인지킴이)’으로도 신고할 수 있습니다.



김소영 기자 ks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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