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모드공유하기
동아일보|사회

[신문과 놀자!/클릭! 재밌는 역사] 광복 이후 치러진 5·10 총선거, 대한민국 민주주의 신호탄을 쏘다

이환병 서울 고척고 교사
입력 2021-12-03 03:00업데이트 2021-12-03 03:24
글자크기 설정 레이어 열기 뉴스듣기 프린트
글자크기 설정 닫기
주도권 놓고 국내 정치세력 대립… 남-북 분열돼 남한에서만 선거 실시
글 모르는 국민 많아 자율성에 한계, 중요 세력 불참 등 아쉬운 점 남지만
역사상 최초의 선거로 큰 의미 지녀
1948년 5월 10일 서울 개운사에 마련된 동대문을 지역구 투표소 앞에서 한 가족이 입후보자들의 선거공보를 보고 있다. 사진 출처 미국 국립문서기록청
광복 이후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의 대립, 국내 정치 세력 사이 갈등으로 극심한 혼란을 겪었습니다. 분단과 전쟁으로 치닫는 과정에서 1948년 5월 10일 총선거(5·10총선거)를 실시했습니다. 5·10총선거는 우리 역사상 최초로 직접 비밀 평등 보통선거의 원칙에 따라 실시한 선거였지만 그 과정과 의의에 대한 평가는 다양합니다. 오늘은 5·10총선거의 과정과 의의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 분열 속 치러진 남한 단독선거
광복 이후 국내 정치 세력들이 가장 극심하게 대립한 시기는 1945년 12월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의 결정 사항이 국내에 알려진 이후와 유엔 총회가 한반도에서 남북한 총선을 실시하라고 결정한 시기입니다.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의 결정 사항은 ①한국에 임시민주정부 수립 ②임시정부 수립의 절차를 논의하기 위한 미·소 공동위원회의 개최 ③최장 5개년간의 미국 소련 영국 중국 4개국의 신탁통치 등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 결정에 대해 김일성과 박헌영 등 좌익 세력은 총체적 지지를 선언하였고, 김구와 이승만 등 우익 세력은 신탁통치가 또 다른 식민통치라고 생각하여 신탁통치반대운동(반탁)을 전개하였습니다.

1947년 9월 17일 한반도 정부 수립 문제는 유엔 총회에 상정됐습니다. 11월 14일 유엔 총회에서는 “인구비례에 의한 총선거를 1948년 3월 31일까지 실시하여 국회를 구성하고 정부를 수립”할 것과 “총선거에서부터 점령군의 철수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감시할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유엔 위원단)을 설치할 것”을 결의하였습니다. 유엔 총회의 결의에 따라 유엔 위원단이 한국에 들어와 활동을 시작하였으나 소련은 유엔 위원단의 북한 입국을 거부했습니다. 결국 유엔 소총회는 1948년 2월 유엔 위원단의 접근이 가능한 지역에서만이라도 선거를 실시하도록 결정하였습니다. 사실상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결정되자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의 결정 사항이 알려졌을 때와 마찬가지로 찬반의 소용돌이에 휩쓸리게 됩니다. 이 결정에 대해 남조선노동당(남로당) 세력뿐 아니라 김구와 김규식도 반대했고, 이승만과 한국민주당 세력은 지지를 선언했습니다. 따라서 5·10총선거에는 이승만을 지지하는 독립촉성국민회 세력과 한국민주당이 선거를 주도하였고, 남한 내의 좌익, 김구를 지지하는 한독당, 김규식을 중심으로 하는 중도 세력은 선거에 불참했습니다. 남한 지역에서조차 반쪽 선거로 치러졌다는 한계점을 지니게 된 것입니다.

○ 높은 문맹률-대규모 충돌 속 치러진 선거
미군정과 유엔 위원단은 자유롭고 민주적인 선거를 치르기 위한 분위기를 조성하려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선거가 사실상 불가능했는데, 그 이유는 크게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 선거를 감시하는 유엔 위원단의 수는 실제 30여 명에 불과해 선거 감시가 형식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미군정이 제공한 통역관의 도움을 받는 소수의 유엔 위원단원이 1만3000여 개 투표구에서 1000만 명에 가까운 유권자의 선거 관련 행위를 감시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했습니다. 둘째, 당시 남로당 세력은 총선을 저지하기 위해 노동자 총파업, 무장봉기 등을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남로당은 선거가 임박한 5월 7일부터 선거 저지를 위한 총력 투쟁에 나섰습니다. 이 과정에서 살인, 선거사무소와 철도 노선 파괴, 전화선 절단 등의 폭력 사건이 발생했고, 검거되거나 투옥된 인원이 5425명, 사망자가 350명에 이르렀습니다. 셋째, 선거에 참여하는 인구의 약 80%가 문맹이었고, 그 선거마저 역사상 최초의 선거였다는 점입니다. 선거법에 따라 유권자가 투표권을 행사하려면 스스로 선거인명부에 등록해야 했습니다. 대부분이 문맹이었던 국민은 선거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거나 선거의 절차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대부분 유권자는 공무원, 경찰, 마을 이장 등의 도움을 받아 선거인명부에 등록하고 선거에 참여해야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5·10총선거는 중요 정치 세력의 불참뿐만 아니라 선거 과정에서도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 어려움 속에서도 전국 200개 선거구 1만3272개 투표구에서 투표가 이루어졌습니다. 당시 유권자 수는 983만4000명, 유권자 중 등록인은 783만7504명이었습니다. 총 유권자 대비 투표율은 71.6%였고, 등록 유권자 대비 투표율은 95.5%였습니다. 총 유권자 대비 투표율은 이후 실시한 국회의원 선거 투표율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 한계 많지만 민주주의 ‘첫발’ 의의
제헌 의원을 선출하기 위해 1948년 5월 10일 실시된 총선거 홍보 포스터. 사진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5·10총선거로 198명의 국회의원을 선출했습니다. 제헌국회 의원들은 5월 31일 국회를 구성하고 헌법 제정에 착수했으며 7월 17일에는 헌법을 제정 공포하였습니다. 그리고 제헌 헌법 53조에 따라 국회에서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했으며, 이승만 대통령은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대내외에 선포하였습니다.

198석 중 무소속이 85석을 차지한 것에 비해 이승만의 독립촉성국민회는 55석, 한국민주당은 29석밖에 얻지 못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선거를 주도한 양대 세력을 모두 합해도 84석에 그쳐 선거를 주도한 세력이 과반을 획득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소속 국회의원의 성향을 분석한 여러 연구결과에 의하면 무소속 의원 중 한국민주당계는 47석, 독립촉성국민회계는 6석, 김구와 김규식 등을 지지하는 세력은 20여 석, 기타 세력은 10여 석으로 분류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실제 의석수는 한국민주당이 76석, 독립촉성국민회가 61석을 차지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승만 정부 시기 한국민주당이 강력한 야당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보이지 않는 의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 사상과 제도가 뿌리를 내리고 제대로 기능을 하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합니다. 5·10총선거는 여러 가지 한계점을 가진 선거였지만, 한국 민주주의의 출발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환병 서울 고척고 교사
당신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
댓글 0
닫기
많이 본 뉴스
사회
베스트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