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H 투기의혹’ 7일만에야…늑장 압수수색-檢빠진 수사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3월 9일 12시 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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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 오후 경기 광명시 한국토지주택공사 광명시흥사업본부에서 압수수색을 마친 경찰 관계자들이 나오고 있다. 광명=송은석기자 silverstone@donga.com
8일 오후 경기 광명시 한국토지주택공사 광명시흥사업본부에서 압수수색을 마친 경찰 관계자들이 나오고 있다. 광명=송은석기자 silverstone@donga.com


한국토지주택공사(LH) 임직원들의 땅투기 의혹이 폭로된 지 1주일 만인 9일 경찰이 압수수색에 나서면서 본격 수사에 착수했다. 하지만 경찰의 강제수사 착수가 늦었을 뿐 아니라 정부합동특별수사본부 수사에서 검찰이 배제된 점 등으로 인해 정부가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에 대한 확실한 의지가 있는 것인지 의구심이 커지고 있다.

먼저 법조계에서는 국민적 공분이 일고 있는 이런 중대한 사안에 대해 사태 초기 자체 조사를 우선시한 정부의 대응 기조를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 많다. 신도시 지정 전에 LH 직원들이 수십억 원을 대출받아 집중적으로 토지를 매입한 정황으로 미뤄볼 때 이번 사안은 개발 정보를 사전에 접한 소수의 공직자들이 정보를 은밀하게 공유하면서 조직적으로 땅 투기를 벌였을 개연성이 큰 만큼 신속한 진상규명을 위해선 ‘자체 조사’가 아닌 ‘수사 체제’로 적극 대처했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하지만 정부는 4일 문재인 대통령의 지시로 국무조정실과 국토교통부, 행정안전부, 경찰청, 경기도, 인천시가 참여하는 합동조사단을 구성해 LH 임직원과 관계부처 공무원, 가족 등에 대한 3기 신도시 토지거래 내역 전수조사를 벌이고 있다. 여기에다 더불어민주당 소속 국회의원과 지방자치단체장 등을 대상으로 한 전수조사 방침까지 밝혔다. 정부는 ‘무관용 원칙’을 강조하면서 부당이득을 3~5배까지 환수하겠다며 엄정 대응을 선언했지만 ‘셀프 조사’의 한계를 벗어나기 어렵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8일 오후 경기 광명시 일직로 한국토지주택공사 광명시흥사업본부의 모습. 광명=송은석기자 silverstone@donga.com
8일 오후 경기 광명시 일직로 한국토지주택공사 광명시흥사업본부의 모습. 광명=송은석기자 silverstone@donga.com

LH를 관할하는 부처인 국토교통부를 합조단에 포함시킨 것을 두고도 실효성 논란이 일고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신도시 개발 정책을 입안한 국토부로도 투기 의혹의 불똥이 옮겨 붙어 수사 대상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국토부는 자체 조사의 주체가 돼서는 안 된다는 지적이 나온 바 있다.

3기 신도시 대상지를 포함해 신도시 땅투기 의혹의 전모를 밝히기 위해선 더더욱 강제수사권이 있는 수사기관이 나서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과거 같으면 의혹이 불거지자마자 부동산 투기 분야의 수사 능력과 경험이 축적된 검찰을 중심으로 곧바로 합동수사본부를 구성해 대대적인 수사에 들어갔을 것이라는 게 법조계의 공통된 시각이다.

검찰 고위 간부 출신의 한 변호사는 “검찰이 수사를 했다면 우선 증거인멸을 막기 위해 의혹 폭로 직후 곧바로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받아 핵심 관련자들의 휴대전화와 PC, 이메일, 각종 개발자료 등 증거부터 광범위하게 확보했을 것”이라며 “수사 초기 압수수색을 가능한 빨리 나가는 것은 수사를 해본 사람들에게는 기본에 해당하는 수사의 ABC”라고 말했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이번 사안에 대해 “즉각적이고 대대적인 수사를 해야 하는 사안”이라고 규정하면서 정부가 미온적으로 대처하고 있음을 비판한 대목도 주목을 끈다. 윤 전 총장은 이번 사건을 “공적 정보를 도둑질해서 부동산 투기하는 것은 망국의 범죄”라며 “자체 조사로 시간을 끌고 증거 인멸하게 할 것이 아니라 즉각적이고 대대적인 수사를 해야 한다”라고 밝힌 바 있다.

사진 뉴시스
사진 뉴시스


경찰이 강제수사에 나서기 하루 전인 8일에는 대검찰청 수사관이 “이번 수사는 망했다”며 정부의 신도시 토지거래 의혹 전수조사의 한계를 지적하기도 했다. 이 수사관은 직장인 익명 앱인 블라인드에 올린 글에서 “검찰이, 아니 한동훈 검사장이 수사를 했다면 오늘쯤 국토부, LH, 광명시흥 부동산업계, 묘목공급업체, 지분 쪼개기 컨설팅업체를 대대적으로 압수수색했을 것”이라며 “논란이 나온 지가 언제인데, 이제야 범죄자인 국토부와 합동수사단을 만드냐”고 비판했다.

경찰 국가수사본부(국수본)는 당초 정부 합동조사단의 전수조사가 마무리된 이후 고발이나 수사 의뢰가 있을 경우에 한해 수사를 시작할 계획이었으나 전날 문재인 대통령이 “경찰 국가수사본부가 발 빠르게 수사를 병행하라”고 지시하면서 9일 압수수색에 나섰다.

이런 지적에도 불구하고 경찰이 국민이 기대하는 것 이상의 수사 성과를 낼 여지는 충분하다. 올해부터 시행된 검경 수사권 조정으로 수사종결권까지 가지며 권한이 커진 경찰은 이번에 검찰을 배제한 상태에서 국가수사본부 중심으로 정부합동특별수사본부를 꾸림으로써 독자적인 수사 능력을 입증할 시험대에 올랐다.

사건의 전모를 밝혀 관련자 전원을 엄벌한다면 경찰에게는 기회가 되겠지만, ‘드루킹 수사’처럼 권력의 눈치를 보며 시간을 끌고 멈칫거리거나 정권 인사 의혹을 비껴 간다는 비판에 직면한다면 국가수사본부의 신뢰도와 위상이 추락할 수도 있다.

이태훈 기자 jeff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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