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문한다고 개선되나요?” 실업팀 선수들, 인권위 조사에 ‘쓴소리’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7월 8일 17시 38분


“백날 천 날 이런 설문하면 뭐하나요. 개선되는 게 없는데….”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가 지난해 여름 전국 실업팀 성인 운동선수들을 대상으로 접수한 모바일 익명 설문에는 체념에 가까운 의견도 나왔다. A 선수는 “감독, 코치가 더러운 짓거리를 해도 밥줄 때문에 버틴다”고 했다.

인권위는 이 설문을 바탕으로 지난해 11월 ‘실업팀 성인선수 1251명 인권실태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조재범 전 쇼트트랙 국가대표 코치(수감중)의 성폭행 의혹 등이 불거진 뒤 ‘스포츠인권특별조사단’을 꾸려 조사에 나섰다.

실태조사에 따르면 선수들은 언어폭력 424명(33.9%)과 신체폭력 192명(15.3%), 성폭력 143명(11.4%·중복응답) 등 다양한 피해를 경험했다. (성)폭력을 목격한 이들도 704명(56.2%)이나 됐다.

특히 이 조사의 자료 부록에 실린 답변 90여 건 가운데 20건은 A 선수처럼 “설문만 하지 말고 대안을 마련하라”는 취지로 답했다. “또 다시 탁상행정으로 끝나지 않길 바란다”는 대답은 양반이었다. B 선수는 “이런 것 좀 조사하지 마세요. 어차피 사실대로 안 나오니까”라며 불쾌한 감정도 드러내기도 했다.

한 시청 실업팀에 소속된 선수(28)는 8일 동아일보와 통화에서 “최숙현 선수 같은 일이 벌어질 때마다 전수 조사한다며 설문을 벌인다”며 “제대로 제도 개선이나 관계자 처벌로 이어진 적이 없다. 결국 피해는 신고한 선수에게 돌아온단 인식이 퍼져있다”고 했다.

C 선수도 “큰 마음먹고 연맹 사무처장한테 말했지만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묵인했다”고 토로했다. 응답자 가운데 21명은 ‘다양한 방법으로 도움을 요청’했지만, 이 가운데 10명이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했다”고 했다.

인권위는 이를 바탕으로 지난해 12월 “독립기구를 만들어 신고와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는 내용의 개선안을 대통령과 관계 부처에 권고하기로 했다. 하지만 실제 권고는 6개월 넘게 미뤄지다 이달 6일 최종 의결했다. 인권위는 “세부 조항 등을 수정하느라 시간이 걸렸다”며 “고 최숙현 선수 관련 사안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던 점을 깊이 반성한다”고 밝혔다.

박종민 기자 blic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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