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싸움 대비한듯한 ‘오거돈 사퇴문’… 피해자 보호 문구는 50자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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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년 4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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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거돈 ‘성추행 사퇴’ 파장]피해자와 약속깨 2차 가해

동아일보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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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추행을 시인하고 사퇴한 오거돈 전 부산시장이 피해 여성 측에 보여줬던 사퇴문 초안에는 모두 4가지 ‘대책’이 담겼던 것으로 알려졌다. △성추행 피해자의 2차 피해 예방 △2차 가해자에 대한 엄중 대처 △부산시 차원의 성폭력 대책 마련 △성폭력 예방을 위한 전담 기구 설립 등이다. 하지만 23일 오전 11시 부산시청에서 오 전 시장이 직접 발표한 사퇴문엔 이런 내용이 거의 담기지 않았고, 법정 싸움을 대비하는 듯한 표현으로 바뀌었다.

○ 대책 발표까지 24시간… “그새 2차 가해 범람”


이 4가지 대책은 오 전 시장이 사퇴 의사를 밝히면 성추행 사건에 이목이 집중돼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가 이어질 공산이 크다는 피해자 측의 우려를 반영한 것이었다. 하지만 사퇴문에서 2차 가해 관련 내용은 “피해자분께서 또 다른 상처를 입지 않도록 이 자리에 계신 언론인 여러분들을 포함해서 시민 여러분들께서 보호해 주십시오”란 50글자가 전부였다.

꼬박 하루가 지난 24일 오전 11시, 변성완 부산시장 권한대행은 기자회견을 열고 2차 가해 차단 대책을 발표했다. 피해자의 신상을 공개하거나 피해 사실을 반복해서 언급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특별 감찰을 벌이고 가해자를 중징계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당초 오 전 시장 측이 피해자에게 보여줬다는 초안에 담겼던 내용들이다.

하지만 피해자 측은 오 전 시장의 사퇴와 대책 발표가 동시에 이뤄지지 않은 탓에 수많은 추측이 난무하며 심각한 2차 피해를 당했다고 호소했다. 피해자를 대변하는 부산성폭력상담소는 24일 입장문을 발표하고 “부산시의 입장 발표가 늦어진 만 하루만큼의 시간은 언론과 정치권, 댓글 등을 통한 끝없는 2차 가해가 범람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며 “그러한 2차 가해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고 밝혔다.

○ “사퇴문 표현, 법정 싸움 대비한 듯”


오 전 시장의 사퇴문에는 피해자 측에 사전에 보여줬다는 4가지 대책 대신에 “5분 정도의 짧은 면담에서 불필요한 신체 접촉을 했다” “강제추행으로 인정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경중에 관계없이 용서받을 수 없다” 등의 문구가 들어있었다.

전문가들은 이런 표현이 피해자에 대한 고려보다는 법정에서 혐의를 부인하기 위해 사용한 전략적 발언일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경찰 관계자는 “‘인정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거나 ‘경중에 관계없이’라는 건 추행의 고의성과 중대성을 부인하려는 표현으로 읽힌다”고 했다. 상담소는 전날 오 전 시장의 사퇴 기자회견 뒤 “사퇴문의 관련 표현 탓에 피해자가 ‘유난스러운 사람’으로 비칠까 두려워하고 있다”고 반발했다.

피해자 측은 오 전 시장이 사퇴 일시를 명확히 밝히지 않았던 점도 피해자에게 큰 고통을 초래했다고 설명했다. 오 전 시장이 ‘4월 30일’로 시한을 못 박아 공증 서류를 작성하긴 했지만 사퇴 일정을 명확히 정하지 않아 피해자가 불안에 시달렸다는 뜻이다. 김예지 부산성폭력상담소 상담팀장은 “발표 시점을 미리 아는 건 피해자의 심적 대비에 매우 중요한 부분인데 오 전 시장 측이 이를 알리지 않아 매우 힘들어했다”고 전했다.

○ 성폭력 2차 가해, 트라우마 초래할 수도


성폭력 상담 전문가들은 성폭력 피해자에게 2차 가해는 ‘트라우마’라 불리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등 정신적 문제도 일으킬 수 있을 만큼 심각한 스트레스라고 지적했다.

장형윤 아주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성폭력 피해자의 심리적 후유증을 추적 관찰해 보면 가해자의 미흡한 대응이 피해자에겐 치명적”이라고 했다. 부산여성단체협의회 등 6개 여성단체는 이날 긴급간담회를 열고 “권력형 성폭력 범죄를 더는 용납할 수 없다. 오 전 시장 사퇴 이후 부산시의 전면 쇄신과 책임감 있는 대응이 필요하다”며 피해자에 대한 가해 방지를 부산시에 요구했다.

구특교 kootg@donga.com·조건희 / 부산=조용휘 기자
#오거돈#성추행 사퇴#2차 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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