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겨울방학이 끝나가던 21일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학교 스포츠과학관에서 고려대학생 박현지 씨(21·여)가 팔다리를 뻗으며 율동을 배우고 있었다. 박 씨가 아침나절부터 이곳에서 어설프게나마 몸을 움직이는 까닭은 다음 달 1일의 플래시몹(사전 약속된 시간과 장소에 모여 특정 행위를 한 뒤 흩어지는 퍼포먼스)을 위해서다. ‘100인 만세운동 플래시몹’이다.
올 3·1절에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서울에서는 많은 행사가 벌어진다. 100인 만세운동 플래시몹은 3·1절 당일 종로 보신각에서 보신각종 타종 직후 그 앞에서 펼쳐진다. 여성은 흰 저고리에 검정 치마를 입고 남성은 하얀 저고리와 바지를 입는 것은 평범해 보이지만 이 만세운동 플래시몹에는 특별한 것이 있다. 참가학생 100명이 100년 전 보신각 앞에서 만세를 부른 학생들의 학교 후배라는 점이다.
독립기념관이 제공한 ‘서울지역 중등급 이상 학생의 구속자 내역’에 따르면 100년 전 그날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학생들의 출신 학교는 경성의학·공업전문학교 보성법률상업학교 연희전문학교 불교중앙학림 배재고등보통학교 휘문고등보통학교 중앙학교 경성고등보통학교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정신여학교 경신학교 중동학교 선린상업학교 등이다.
이들 학교 가운데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고교 및 대학은 총 14개교다. 고려대 동국대 서울대 연세대 등 대학 4개교와 경기고 경신고 배재고 보성고 선린인터넷고 이화여고 정신여고 중앙고 중동고 휘문고 등 고교 10개교다. 이들 학교 재학생 102명이 플래시몹에 참여한다.
학생들은 대부분 자발적으로 모였다. 박 씨는 어릴 때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에게 들은 이야기의 영향이 컸다. 전남 정읍에 살던 외할머니는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시집을 빨리 갔다고 했다. 외할아버지는 일제강점기이던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먹을 게 없어 나무껍질을 벗겨 죽을 쒀먹었다고 했다. 박 씨는 고등학생 때부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관련 기사를 챙겨보곤 했다. 하지만 이들을 위해 행동에 나서지 못해 아쉽던 차에 대학 동아리 사이트에 올라온 플래시몹 참여 학생 모집 공고를 보고 지원했다. 박 씨는 “유튜브에서 플래시몹 동영상 보는 걸 좋아했는데 그 플래시몹으로 3·1운동을 기릴 수 있을 것 같아 참여했다”며 “기억이 남는 일 없이 보낼 뻔한 겨울방학의 마지막을 의미 있게 보낼 것 같다”고 말했다.
어색할 법도 한데 이날 오전 10시부터 오후 2시까지 한 연습은 화기애애하게 이뤄졌다. 오전에 모인 학생 60여 명은 열 명씩 6개조로 나눠 안무를 연습했다. 서로 마주서서 손을 맞잡고 좌우로 몸을 비틀며 준비운동을 하고는 둥글게 모여 점프하거나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는 등의 동작을 익혔다. 안무 영상을 예습해온 덕에 평상시 몸을 쓸 일이 많지 않던 학생들도 곧잘 따라했다. 안무 보조로 지목된 학생이 “잘 못춘다”며 손사래 치자 안무를 가르치던 청년이 “독립운동도 얼떨결에 시작하기도 하고 다 그렇게 시작하는 거예요”라며 끌어당기자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졌다.
중동고 노영화 군(17)은 “한국사교과서에서 3·1운동에 우리 학교도 참여했다는 걸 알고 신기하면서도 뿌듯했다”며 “조금이나마 그 의미를 함께하고 싶어 친구들과 참여했다”고 말했다. 정영준 서울시 역사문화재과장은 “100년 만에 후배들이 선배들의 고귀한 뜻을 잇는 행사에 참여한 학생들에게 감사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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