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세 日 강제징용 피해자, 숨진 동료 생각에 눈물…“같이 왔어야”

  • 뉴스1
  • 입력 2018년 10월 30일 15시 05분


원고 故김규수씨 대신 아내가 자리하기도
청소년, 강제징용 배지 모금액과 편지 이춘식씨에 전달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 이춘식씨(94)가 일본기업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13년8개월만에 승소했다. 재판이 하염없이 지연되는 사이 동료들이 모두 세상을 등지면서 힘든 싸움을 홀로 견뎌온 그다. 이씨는 ‘상고기각’이라는 재판부의 선고가 나오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30일 대법원 대법정 앞은 오후 2시 예정된 전원합의체 선고를 기다리는 취재진으로 북적였다. 이씨는 오후 1시36분께 휠체어를 타고 2~3명의 부축을 받으며 등장했다. 고령에 거동이 편치 않았지만 오직 재판을 두 눈으로 직접 보기 위해 오전 9시 광주 송정역에서 KTX를 타고 서울에 왔다.

취재진 100여명의 질문 공세에 이씨는 “좋은 취재를 해줘서 대단히 고맙다”는 말을 변호인을 통해 전달하고는 법정 안으로 들어갔다. 중절모를 벗으며 자리에 앉은 그는 재판이 곧 시작한다는 안내방송에 마른 입술을 질근 깨물었다. 옆좌석에 앉은 변호인이 “잘 될 겁니다”라고 안심시키기는 모습도 보였다.

이날 방청석에는 이 사건의 1심 변호를 맡았던 천정배 민주평화당 의원(광주 서구을)도 자리했다.

오후 2시 정각 법정에 들어온 김명수 대법원장은 잠시 숨을 고르고는 “지금부터 전원합의체 판결을 선고하겠다”며 지체없이 판결문을 읽어내렸다.

이씨는 김 대법원장이 “강제동원 위자료 청구권은 청구권 협정의 적용 대상에 포함된다고 볼 수 없다”며 상고기각 사유를 쭉 읽는 동안 대법관 쪽에 시선을 고정하고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김 대법원장이 ‘주문상고를 모두 기각한다’ 란 말로 선고를 마치자 귓속말로 변호인과 가족에게 결과를 확인한 이씨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수년간 이어져온 긴 싸움의 끝을 얼떨떨하면서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듯 보였다.

이씨는 선고 후 취재진에 세차례 경례를 했다. 그는 세상을 떠난 동료들을 가리켜 “오늘 나 혼자 이 자리에 나와서 많이 슬프고 눈물이 난다. 같이 왔어야 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이어 “혼자있는 내 마음이 슬프고 초조하다”며 연신 동료들에 대한 그리움을 드러냈다.

원고 고(故)김규수씨 대신 법정에 온 그의 아내 최정호씨(85)는 “올 6월에 돌아가셨는데 좀 더 일찍 판결이 났다면 보고 가실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4명이 신일본제철(현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소송이 제기된 지 13년8개월만에 나온 결과다. 이번 판결로 신일본제철은 피해자 1인당 1억원씩을 지급해야 한다.

이씨는 열일곱살이던 1941년, 기술을 배울 수 있다는 말 한마디에 보국대에 지원했다. 돈을 벌기 위해 고향을 떠났지만 막상 도착한 노동현장은 기대와는 전혀 다른 곳이었다. 그는 하루 12시간씩 철재를 나르는 단순노동에 시달려야 했고 임금은커녕 기술을 배울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 2년동안 겪은 고통의 시간은 철재 위로 넘어져 생긴 배 위의 큰 흉터만큼 짙은 상처로 남았다.

일본 패망 후 이씨는 돈을 받기 위해 제철소를 찾았지만 헛수고였다. 원고 4명 중 여운택씨와 신천수씨도 1997년 12월 일본 오사카지방재판소에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체불임금 및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으나 최종 패소했다. 이씨 등은 2005년 한국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1,2심은 일본의 확정판결이 한국의 선량한 풍속, 기타 사회질서에 어긋난다고 볼 수 없어 효력이 인정된다며 원고 패소 판결했다. 하지만 2012년 대법원 1부(주심 김능환 대법관)는 하급심을 뒤집고 손해를 배상하라는 취지로 사건을 서울고법에 돌려보냈다.

파기환송심은 대법원 판단에 따라 “원고들에게 각 1억원과 지연손해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피해자들의 첫 승소판결이었다. 하지만 일본기업이 불복하면서 사건을 다시 접수한 대법원은 이후 판단을 5년 넘게 미루는 동안 원고 중 생존자는 이씨 한 명만 남았다.

(서울=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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