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걸렸어요” 사이버앵벌이 뒤 먹튀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4월 12일 03시 00분


코멘트
‘자궁암에 걸렸어요. 곧 병원에서 수술을 받습니다. 저를 위해 기도해주세요.’

지난달 12일 20, 30대 전업주부들이 자주 찾는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 이런 글이 올라왔다. 자신을 3년간 이 커뮤니티에서 활발히 활동해온 회원이라고 소개한 A 씨는 “여러분의 응원이 필요하다”고 호소했다. A 씨의 간절한 글을 읽은 회원들은 바로 ‘애정해요’로 응답했다. 애정해요란 이 커뮤니티 회원들끼리 덕담 또는 위로의 말을 나누거나 선물을 주고받을 때 쓰는 표현이다. 커피, 음료수, 화환까지 A 씨에게 보내는 ‘애정 선물’이 줄을 이었다.

훈훈했던 분위기는 보름 뒤 급변했다. 암에 걸렸다던 A 씨의 사연은 거짓이었다. 이는 A 씨가 입원했다던 병원으로 한 회원이 직접 애정 선물을 보내는 과정에서 드러났다. A 씨는 그곳에 없었고 입·퇴원 명부에도 A 씨의 이름은 적혀 있지 않았다.

A 씨 사례처럼 인터넷 커뮤니티나 동호회에 거짓 사연을 올려 선물을 받아내는 이들이 최근 늘어나고 있다. 받은 선물을 ‘중고나라’ 같은 사이트에 내다팔아 돈을 벌거나 선물만 챙기고 잠적해버리는 ‘먹튀’ 회원이 대표적이다.

애정 선물 주고받기는 2000년대 후반부터 유행해왔다. 커뮤니티마다 ‘드림 선물’, ‘나눔 선물’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커뮤니티 회원 대다수가 전업주부이기 때문에 애정 선물 문화는 점점 퍼져나갔다. 직장생활을 하지 않고 친구도 자주 만나지 못하다 보니 온라인 공간에서 알게 된 이들에게 더욱 친밀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김모 씨(28·여)는 “진료를 잘하는 소아과 정보, 시집살이 스트레스 푸는 법 같은 얘기를 나누다 보면 친밀감이 더 커진다. 온라인에서 애정 선물을 주고받다 실제 오프라인 친구가 된 사람도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 보니 누군가 올린 사연이 거짓임을 알았을 때 받는 충격도 크다. A 씨의 자작극을 본 한 ‘골수’ 회원은 상처를 받아 커뮤니티를 탈퇴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모 씨(33·여)는 “문제가 계속되니 애정 선물 주고받기를 그만두자는 운동을 벌이는 이들도 있을 정도”라고 하소연했다. 일부 커뮤니티에서는 ‘매너손 해라’(선물을 받았으면 사례를 해라), ‘먹튀하지 마라’(선물 받은 후기를 올려라) 같은 요구도 나온다.

일각에서는 애정해요 커뮤니티가 한때 몸살을 앓았던 ‘달콤 창고’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고 우려한다. 달콤 창고는 초콜릿, 사탕 같은 먹을거리와 응원 메시지를 담은 메모지를 자발적으로 넣어두는 지하철역 물품 보관함인데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이 창고를 다 털어가 문제가 된 적이 있다.

신광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사회가 각박해질수록 이웃의 정(情)을 느낄 기회가 줄어들면서 온라인에서 교류하는 이들과 정을 나누는 애정 선물 같은 문화가 등장한 것”이라며 “일부의 기회주의적 행동은 사회 전반적인 신뢰까지 해치는 결과를 불러올 수 있다”고 진단했다.

박창규 kyu@donga.com·이호재 기자
#사이버#앵벌이#사기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