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세상/우지희]뜻밖의 전화에 감동이 뭉클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4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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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회사에서 영어 교육 콘텐츠를 개발하고 있다. 유아나 초등학생용 이야기책부터 수능 대비 수험서까지 영어 교재를 만드는 게 주된 일이다. 교재에 관한 독자들의 전화 문의에 응대하기도 해야 한다. 오탈자나 교재 오류에 대한 건의를 받는 것인데, 그저 전화 몇 통을 받는 일이라고 하기엔 만만치 않은 고충이 있다.

매일 아침 전화로 과외를 받듯 교재의 문제 하나하나를 붙잡고 풀이 방법을 요청하는 고객도 있고, 반 이상이나 푼 문제집을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환불해 달라는 사람도 있다. 다짜고짜 영어 잘하는 사람 바꾸라는 역정을 내거나 자신의 의견이 맞고 교재가 틀렸다며 억지를 부리기도 한다. 콘텐츠 개발자로 입사해 처음 이 업무를 하게 되는 사원들은 이 감정노동에 꽤 상처를 받는다. 그래서 후배들에게 이 업무를 물려줄 때 굉장히 미안해하면서도 동시에 기뻐하는 진풍경이 벌어진다.

우지희 능률교육 콘텐츠개발본부 대리
우지희 능률교육 콘텐츠개발본부 대리
연차가 쌓이면서 나도 고객을 응대하는 업무에서 해방되었다. 신입사원 때처럼 전화벨 소리에 깜짝깜짝 놀라는 일도 사라졌다. 그러다 지난주 출근 직후 걸려온 전화를 아무렇지 않게 받았을 때 왠지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전화기 건너편에서는 익숙한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부르며 날 찾고 있었다.

그녀는 나에게 오랜 기간 ‘블랙 컨슈머’였다. 우리 회사의 영어사전을 구매한 고객이었는데 시도 때도 없이 전화를 걸어 영어 궁금증을 나에게 마구 물었다. 회사가 만든 사전에는 어지간한 단어가 모두 수록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교재와 관련 없는 내용이라 답변드릴 수 없다고 넘어가기도 애매했다. 헬스클럽의 트레드밀(러닝머신)에서 뛰다 헉헉대며 갑자기 생각났다면서 전화했고, 개인적으로 공부하다가 답답한 부분도 서슴없이 물어봤다.

한 번 걸려온 전화는 한 시간씩 지속되기 일쑤였고 업무에 방해가 되는 경우도 잦았다. 결국 지친 내가 “이러시면 곤란하다”며 정중히 거절을 했지만 그녀는 “여기가 아니면 물어볼 데가 없다”며 문의를 멈추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전화가 뜸해지기 시작했고 이후 후배에게 그 고객의 소식을 물어도 특별한 얘기가 없어서 이제 영어 공부를 그만뒀나 보다 했다. 그 뒤 2년 만에 내 책상으로 전화를 한 것이었다.

나는 또 무슨 황당한 질문을 받을까 두려워 황급히 “현재 담당자에게 전화를 돌려드리겠다”고 했다. 그러자 그녀는 “아뇨, 아뇨, 예전에 제 전화 받아주시던 그분 맞죠? 오늘은 질문이 아니고 감사하다는 말씀 전하려고요”라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미국에 있는 유명 대학의 경영학과에 입학하게 되었다며 그동안 자신이 그 영어사전으로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는지 신이 나서 말했다. 영어를 독학한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았지만 틈틈이 우리 회사로 전화해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 고백했다. 한참을 들떠 얘기하던 그녀는 급기야 울음을 터뜨렸다. “제가요, 이제 오프라 윈프리 쇼를 다 알아듣고요. 못 읽는 영어책도 없어요. 너무 감격스러워요.”

이제야 털어놓는 그녀의 사연은 참으로 기구했다. 그녀가 그 영어사전을 구입한 것은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이었다고 한다. 부모님의 식당 일을 도우며 간신히 대학에 입학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졸업하지 못했고, 그래도 영어 공부가 너무 하고 싶어 애를 끓이다 무작정 사전을 첫 장부터 끝 장까지 공부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엉엉 울면서 “그때는 신세를 많이 졌다”고, “그동안 많이 죄송하고 감사했다”고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이런 전화를 받게 될 줄은 꿈에도 상상을 못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세상에 이런 사람도 있구나, 그래도 다 잘되셨으니 다행이다 싶었다. 그런데 머릿속에 몇 번이고 고맙다며 앞으로도 좋은 책 많이 써달라는 당부가 맴돌자 왠지 마음이 먹먹해졌다. 사전 한 권을 사 걸레처럼 너덜너덜해지도록 공부한 그녀의 열정과, 내가 만든 어떤 책이 누군가에게는 그렇게 소중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니 마음 한구석에 뭉근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무엇보다도 뜻밖의 전화 한 통에 내가 하는 일에 대한 자부심과 책임감이 한층 더 생겼다.

다시 한번 더 이런 전화를 받을 수 있도록 지금 만드는 책에 더욱 박차를 가해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혹여나 마음이 풀어질 때는, 울음 섞인 그녀의 목소리를 떠올릴 것이다.
 
우지희 능률교육 콘텐츠개발본부 대리
#영어 교육 콘텐츠 개발#감정노동#블랙 컨슈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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