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커버스토리]엄마와 배낭여행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8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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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도관광 달라졌네

지난해 8월 크로아티아 여행을 다녀온 아들 남권우 씨(25·왼쪽)와 어머니 송혜경 씨(55). 남권우 씨 제공
지난해 8월 크로아티아 여행을 다녀온 아들 남권우 씨(25·왼쪽)와 어머니 송혜경 씨(55). 남권우 씨 제공
여행은 사회 변화의 가늠자다. 시대상에 따라 여행의 목적지가 바뀌고 떠나는 방식도 달라진다. 1989년 해외여행 전면 자유화 이후 1990년대 들어 미지의 세계를 찾아 떠나는 배낭여행 시대가 본격적인 문을 열었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가 닥치면서 뜨거웠던 배낭여행 열기도 사그라들었다. 2000년대 들어 인터넷 발달에 힘입어 패키지 상품 대신 호텔팩, 에어텔을 찾는 이들이 늘어났다. 요즘은 전 세계 누군가의 집 한 채, 방 한 칸을 빌려 여행을 떠나는 시대가 됐다.

각양각색의 여행 방식이 등장했지만 변함없는 수요를 자랑하는 것이 바로 ‘효도여행’이다. 환갑이나 칠순 때 당연하게 여기던 잔치문화가 서서히 사라지면서 효도여행이 갈수록 인기를 모으고 있다. 할아버지 할머니부터 젖먹이 손주까지 함께하는 특성 탓에 최근까지 효도여행은 주로 동남아 등지를 도는 ‘관광’이 대세였다. 그러나 최근에는 부모와 미혼의 성인 자녀가 함께 전 세계를 도는 가족형 배낭여행이 인기를 모으고 있다.

변화의 배경은 다양하다. 패키지여행에 대한 거부감이 커진 데다 일방적이었던 부모, 자식 간의 관계가 ‘쌍방향’으로 바뀌었다는 의견도 있다. 외국어 능력, 글로벌 마인드로 무장한 자녀들이 돈 대신 경험 공유를 통해 효도를 실천하는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이유야 어쨌든 ‘모시는’ 여행 대신 ‘함께하는’ 여행이 현실이 된 것이다.

가족들이 밝힌 이유는 더욱 단순했다. 전 세계 각지로 여행을 떠났거나 계획 중인 가족들은 그 이유에 대해 “더 늦어지면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라고 입을 모았다. 아직 올 휴가 계획을 세우지 않은 이들은 귀 기울여 볼 만한 이야기다.  

▼ “부모님과 떠나요”… 아들딸이 여행 가이드 역할 ▼

고령화로 환갑-칠순
잔치 드물어… 젊은 부모들 자녀와 동반여행 추세
“경비 분담… 스케줄 갈등도 적어”, 휴양지로 ‘보내드리는 여행’에서
배낭메고 ‘함께 떠나는 여행’으로

#1 2015년 4월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올 4월 이탈리아를 여행 중인 아버지 조명하 씨(60·왼쪽)와 아들 방현 씨(31). 조 씨 부자는 28일간의 여행 동안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로마를 여행했다. 조방현 씨 제공
올 4월 이탈리아를 여행 중인 아버지 조명하 씨(60·왼쪽)와 아들 방현 씨(31). 조 씨 부자는 28일간의 여행 동안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로마를 여행했다. 조방현 씨 제공
앞서 길을 걷던 아버지가 불쑥 고개를 돌려 사진을 찍자고 했다. 손가락으로 가리킨 건 순례길 위에 새겨진 부자(父子)의 그림자였다. 벙거지 모자에 손에는 등산용 지팡이를 쥔 두 남자의 그림자는 마치 쌍둥이처럼 닮아 있었다. 아버지는 “(그림자를 보니) 너와 내가 닮았다”고 말하고는 다시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부자는 그렇게 엿새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다.

아버지의 말 때문이었을까. 순례길을 걸으며 부자는 서로에게 한 뼘 다가갔음을 느꼈다. 대장정의 끝에 선 순간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를 끌어안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나도 모르게 “열심히 살겠습니다. 아버지”란 말이 튀어나왔다.

3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떠난 여행이었다. 아버지와의 여행을 결심하는 것도 쉽지만은 않았다. 고교 2학년 때 크게 꾸중을 들은 뒤로 아버지는 늘 불편하고 멀기만 한 존재였다. 미국 대학원 진학을 앞두고 있던 아들 조방현 씨(31)는 “유학을 떠나기 전 아버지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가장이 되기 전 아버지는 어떻게 살았는지, 아들은 어떻게 키웠는지 묻고 싶었다”며 여행을 결심한 계기를 설명했다.

낯선 타국만큼이나 아버지의 모습도 늘 새로움의 연속이었다. 무뚝뚝한 줄로만 알았던 아버지는 이탈리아 로마의 한 숙소에서 고생했다며 관리인에게 티라미수를 건넸다. 아들도 마냥 철부지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조 씨는 “외국인과의 대화는 물론 길을 찾을 때마다 의지하는 아버지에게 인생 처음으로 책임감을 느꼈다”고 회상했다. 조 씨 부자에게 28일간의 여행은 늘 부족하기만 했던 관계에 새로 놓인 징검다리였다.

#2 2015년 7월 프랑스 파리 클리시 광장 지하철역

지난해 5월 프랑스 파리 에펠탑 앞에서 어머니 윤명숙 씨(52·오른쪽)와 딸 윤나경 씨(27). 윤 씨 모녀는 6박 8일간 파리와 영국 런던을 여행했다.
지난해 5월 프랑스 파리 에펠탑 앞에서 어머니 윤명숙 씨(52·오른쪽)와 딸 윤나경 씨(27). 윤 씨 모녀는 6박 8일간 파리와 영국 런던을 여행했다.
지하철 표를 끊는 내내 어머니는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먹이를 찾았다는 듯 한 히스패닉 계열의 남성이 모녀에게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주변을 어슬렁였다. 개찰구에 들어서려던 때였다. 히스패닉 남성이 접근한 것을 느낀 순간 어머니는 “뛰어”라고 외쳤고 딸은 영문도 모른 채 카메라와 가방을 움켜쥔 채 뛰기 시작했다. 가까스로 택시를 잡아타고 어머니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뭔가 이상했다. 딸의 여권이 사라진 것. 지하철 표 기계에 수상하게 동전을 넣다 빼던 노랑머리 아이가 마음에 걸렸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부푼 꿈을 안고 프랑스 파리에 도착한 모녀는 여행 첫날부터 영사관을 찾아가야 했다.

여행은 에피소드의 연속이었다. 그 후로 모녀는 파리 여행 내내 지하철을 탈 때면 늘 등을 맞대고 섰다. 또다시 소매치기에 당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어머니는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는 듯 잠잘 때도 노란 전대(纏帶)를 품에서 떼지 않았다. 어머니의 전대 사랑은 다음 목적지인 스위스에 갈 때까지 이어졌다.

사실 남부럽지 않은 모녀지간이었지만 함께할 시간은 갈수록 줄고 있었다. 딸 송윤주 씨(28)가 직장 생활을 시작하면서 두 사람이 얼굴 볼 일이 더욱 줄었다. 윤주 씨는 어느 날 서른이 되기 전 엄마와 여행을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 김미라 씨(53)의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9년 전 갑작스럽게 친정아버지를 떠나보낸 뒤 단 2박 3일조차 함께 여행을 못한 사실이 늘 마음에 걸리던 차였다. 어렵사리 휴가를 맞춰 그나마 왕복 항공편이 많은 파리를 목적지로 정했다. 두 번째 목적지인 스위스는 7년 전 윤주 씨가 배낭여행으로 들른 나라 중에서 가장 좋아했던 곳이다.

여행 시작부터 끝까지 모든 것은 고스란히 김 씨 모녀의 몫이었다. 항공편과 숙소를 직접 정하고 예쁜 건물을 찾아 골목골목을 돌다가 때론 길을 잃기도 했다. 블로그를 보고 찾아간 맛집에서는 고된 하루를 잊게 해주는 벅찬 희열을 느꼈다. 그렇게 8일간의 유럽 여행은 김 씨 모녀의 인생에 새로운 페이지가 됐다.

효도여행이 달라지고 있다. 과거 출가한 자녀가 부모를 휴양지로 보내주는 단체여행이 대세였다면 최근에는 자녀가 직접 부모와 함께 계획을 세워 여행지를 찾아 배낭여행을 떠나는 사례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여행의 유형이 변하면서 여행지도 달라지고 있다. 과거 태국 등 동남아 휴양지 중심에서 벗어나 유럽과 미국 등 장거리 여행이 확산되는 추세다. 효도여행 ‘2.0 시대’가 열린 것이다.

동아일보 취재팀은 본격적인 여행 시즌을 맞아 부모와 자녀가 함께 해외로 배낭여행을 간 적이 있거나 앞으로 갈 계획인 13가족을 인터뷰했다. 이들이 함께한 여행에는 여행 트렌드 변화는 물론 사회 변화상, 세대적 특성 등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모시는’ 여행에서 ‘함께하는’ 여행으로

지난해 2월 열흘간 유럽을 여행했던 아들 김정래 씨(27·왼쪽)와 어머니(51)가 여행 막바지 독일 하이델베르크에서 찍은 사진. 한 신혼부부가 ‘모자(母子) 여행’이 보기 좋다며 찍어준 사진이다.
지난해 2월 열흘간 유럽을 여행했던 아들 김정래 씨(27·왼쪽)와 어머니(51)가 여행 막바지 독일 하이델베르크에서 찍은 사진. 한 신혼부부가 ‘모자(母子) 여행’이 보기 좋다며 찍어준 사진이다.
한국관광공사가 지난해 18세 성인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해외여행 동반자로서 부모는 친구와 동료, 배우자는 물론 심지어 ‘혼자’보다도 우선순위에서 밀린다. 그동안 성인 자녀가 부모와 함께 해외여행을, 그것도 배낭여행을 떠나는 그림은 상상하기 힘들었다. 그럼에도 이들이 부모와 혹은 부모가 다 큰 자녀와 함께 기어이 배낭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뭘까.

지난해 어머니와 함께 프랑스, 영국 여행을 다녀온 윤나경 씨(27·여)는 부모와 함께하는 여행의 장점으로 일정 및 경비 부담에서 자유로운 점을 꼽았다. 친구, 직장동료 등과 여행 일정을 맞추려다 골머리를 앓아본 경험이 있는 이라면 가급적 자신에게 맞춰주는 부모와 여행을 가는 편이 낫다는 설명이다. 최근 7, 8월 극성수기를 피해 휴가를 떠나려는 이들이 늘면서 이런 추세는 더욱 확산되고 있다. 과거 자녀가 대부분의 비용을 지급하는 효도관광과 달리 재정상태가 비교적 여유 있는 장년층 부모가 자신의 비용을 지불하면서 부담도 줄었다는 얘기다.

물론 일정 선택의 편리함만으로 여행 파트너를 정하는 건 아니다. 파트너가 편하지 않으면 여행 또한 편할 수 없는 법. 부모 자식 관계의 변화도 영향을 줬다는 설명이다. 과거 상명하복식에서 수평적이고 또 소통을 중시하는 부모 자녀 관계로 변하면서 선뜻 부모를 여행 파트너로 선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한준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사회 전반적으로 부모와의 화목을 강조하는 것도 중요한 원인”이라며 “‘모시고 다니는 것’보다 ‘같이 가는 것’이라는 인식이 강해졌다”고 설명했다.

직장인 자녀 세대가 교환학생, 여행 등으로 해외 생활에 친숙하다는 점도 영향을 줬다. 다음 달 부모와 함께 해외여행을 갈 계획인 직장인 김무건 씨(29)는 4년 전 워킹홀리데이를 갔던 호주를 여행지로 정했다. 기왕이면 본인이 익숙한 곳에서 함께 여행을 하는 것이 좋을 것이란 생각에서다. 독일에서 유학 중인 조하라 씨(22·여)는 화가인 어머니를 위해 현재 알프스 산맥을 함께 여행 중이다. 염서호 경기대 관광학부 교수는 이런 상황에 대해 “과거 효도여행이 비용을 지급하는 식이었다면 이제는 외국어 능력과 풍부한 해외 경험 등으로 다른 형태의 효도를 하는 셈”이라고 설명했다. 글로벌 사업을 하는 국내 기업이 많아지면서 해외 여행지에서 각종 숙박 제휴 할인 서비스 등을 받게 된 것은 덤이다.

부모 입장에서도 사실상 환갑, 칠순잔치가 무의미해진 상황에서 억지로 자리를 마련하기보다는 젊은 시절 미처 가보지 못한 배낭여행에 도전해 보겠다는 이들도 적지 않다. 해외여행의 큰 장벽 중 하나인 언어 문제 등을 자녀가 해결해주면서 부담을 덜게 된 부분도 있다. 한때 붐을 일으켰던 패키지여행에 질린 부모들이 자녀의 손을 잡고 떠나는 일도 많다. 가이드에 끌려다니는 일정, 기념품 강매 등을 경험해 본 이들이 한두 곳을 둘러보더라도 좀 더 편하게 움직일 수 있는 자유여행을 선택하게 된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함께하는 여행을 결심하게 한 것은 ‘어쩌면 앞으로 함께 여행할 기회가 많지 않을 것’이라는 아쉬움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결혼을 앞두고, 혹은 취업 후 첫 출근까지의 짬을 내 항공권을 끊는 이유가 이 때문 아닐까.

적극적인 딸 그리고 소극적인 아버지


독일에서 유학 중인 딸 조하라 씨(22·왼쪽)가 이달 4일 어머니 이유숙 씨(53)와 스위스 알프스를 여행하던 중 사진을 찍고 있다. 만년설을 보고 오는 길이라 8월에도 두툼한 옷을 입고 있다.
독일에서 유학 중인 딸 조하라 씨(22·왼쪽)가 이달 4일 어머니 이유숙 씨(53)와 스위스 알프스를 여행하던 중 사진을 찍고 있다. 만년설을 보고 오는 길이라 8월에도 두툼한 옷을 입고 있다.
모든 여행이 그러하듯 부모 또는 자녀와 함께하는 여행이라고 마냥 낭만적이지는 않다. 긴 일정에 여러 곳을 돌아다니는 배낭여행을 함께하려면 고려해야 할 변수가 많다. 목적지 선택부터 숙소, 식당 선택 하나하나에 보다 세심한 배려가 요구된다.

올 추석 연휴 때 어머니와 여행을 떠나는 직장인 문자연 씨(26·여)가 목적지로 체코 프라하를 선택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문 씨는 “유럽 대표 관광지인 스페인, 이탈리아도 고려했지만 보다 동선을 최소화하고 조용한 여행지를 찾다 보니 프라하를 택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문 씨 모녀는 열흘간의 여행 동안 펜션형 한인 민박 한 곳에서만 머무를 계획이다. 여행 일정에 한식식당을 추가하는 것은 기본. 비용 부담을 감수하고서라도 경유 대신 직항 노선을 선택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배낭여행에 대비해 기본체력을 기르는 것은 부모, 자녀 할 것 없이 해당되는 이야기다.

이런 여행에서 아버지들이 소외되는 것도 특징이다. 실제로 취재팀이 만난 13가족 중 아버지가 참여한 경우는 총 2가족밖에 없었다. 반면 산티아고 순례길로 떠난 조 씨 부자를 빼곤 늘 어머니가 동행했다.

물론 기본적으로 아버지는 직장에 다닌다는 이유가 크다. 하지만 그만큼 현실을 뛰어넘을 동기 부여가 쉽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자기표현이 확실한 젊은이들이 여전히 가부장적인 아버지를 부담스러워하는 경향이 있다”며 “평소 자주 소통하는 어머니를 보다 편한 여행 파트너로 생각하는 것”이라고 했다.

딸은 아들보다 부모와의 여행에 적극적인 편이다. 한국관광공사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전체 표본 중 20, 30대 여성만이 ‘혼자’ 여행보다 부모와의 여행을 선호했다. 남성에 비해 비교적 사회생활이 이른 데다 결혼하기 전 부모에게 효도해야겠다는 인식이 상대적으로 강하게 드러난 것으로 분석된다.

“모든 위대한 여행자가 그러했듯이. 나는 내가 기억한 것보다 많은 것을 봤으며 내가 본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기억한다(Like all great travellers, I have seen more than I remember, and remember more than I have seen).” 영국의 정치인이자 작가인 벤저민 디즈레일리가 남긴 여행 관련 명언이다. 여행의 기억은 늘 여행의 순간보다 아름답다. 부모 자녀와 함께 여행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여행 선배들이 남긴 공통의 메시지다. 아직도 휴가 일정을 정하지 못해 고민하는 이들이 있다면 올해는 새로운 시도를 해보는 건 어떨까.

강홍구 기자 windup@donga.com
노덕호 인턴기자 미국 남캘리포니아대 세무회계학과 졸업
#해외여행#배낭여행#효도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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