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박재명]변사체 키도 안 잰 경찰의 ‘B급 코미디’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7월 3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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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병언 일가 수사]
1차 부검때 기본 정보조차 누락… 잇단 헛발질이 음모론만 키운꼴

박재명·사회부
박재명·사회부
“1차 부검 때는 시신의 키가 얼마였나요?”(기자)

“그냥 행려병자인 줄 알고….”(경찰)

전국의 경찰 수사를 책임지는 김귀찬 경찰청 수사국장이 29일 오후 기자 브리핑을 자청했다. 같은 날 새정치민주연합 박범계 원내대변인이 “최근 발견된 변사체가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 시신이 아니라는 경찰 증언을 확보했다”고 주장하자 맞대응에 나선 것.

이날 ‘가짜 유병언’ 논란의 핵심은 변사체의 신장이었다. 박 의원은 “21일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 시신을 감식할 때 키가 150cm로 나와 경찰 관계자조차 ‘유병언이 아니다’라고 확신했다”고 주장했다. 경찰은 시신의 목뼈 3개가 떨어져 생긴 ‘착오’라며 대퇴골 길이를 통해 추정한 신장이 유 전 회장과 비슷한 159.2cm라고 밝혔다.

경찰의 해명을 듣는 자리였지만 여기서조차 초동수사 부실 정황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기자들이 “1차 부검 때 잰 키가 얼마인가”라고 묻자 경찰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유 전 회장 시신은 6월 12일 발견돼 다음 날 전남 순천 현지에서 1차 부검을 했다. 변사체를 부검하면서 키를 측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변사자 보고에 반드시 담아야 하는 내용이다. 김 국장은 “변명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시신 관리가 소홀했다”고 인정했다.

유 전 회장 시신 발견을 둘러싼 경찰의 ‘B급 코미디’ 수준의 실수는 처음이 아니다. 시신에서 떨어진 목뼈 3점을 방치해 인근 주민이 2점을 주워갔다가 다시 경찰에 돌려줬다. 유류품인 지팡이도 경찰이 버리고 가 최초 신고자가 챙겼다. 유 전 회장이 신던 신발을 ‘와시바(Waschbar)’라는 명품이라고 발표했다가 ‘세탁 가능한’이란 뜻의 독일어라는 것을 뒤늦게 알고 정정한 것은 애교로 보일 정도다.

인터넷에 떠도는 각종 ‘유병언 음모론’에는 경찰의 연이은 헛발질도 한몫했다. 실수로 뒤범벅된 경찰 수사 결과보다는 ‘발견된 시신이 유병언의 동생’이라거나 ‘유병언은 해외로 도주하고 인근 노숙인 시신을 자신으로 위장했다’는 근거 없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은 것이다.

경찰은 유언비어 유포에 대해 수사 착수도 검토하고 있지만 지금 필요한 것은 반성이다. 이성한 경찰청장은 이번 사태 이후 유감 표명 한 번에 그쳤다. 경찰에 대한 ‘신뢰 위기’가 정부 전체로 번지기 전에 이 청장이 직접 부실 수사 내용을 낱낱이 밝히고 국민 앞에 석고대죄하는 것도 방법이다.

박재명·사회부 jmpark@donga.com
#유병언#경찰#코미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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