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窓]68년 해로 노부부 ‘우물속 순애보’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1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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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 오전 8시 반경 전남 장흥군 장동면 한 마을회관 주변의 무밭. 정모 할아버지(91)와 김모 할머니(84) 부부는 가을 가뭄에 말라있는 무에 물을 주고 있었다. 두 사람은 올해로 결혼한 지 68년 된 노부부.

김 할머니가 무밭 옆에 있는 우물에서 두레박으로 물을 퍼 올리던 중 몸의 중심을 잃고 우물 속으로 떨어졌다. 우물은 지름 1m에 깊이가 4m나 됐다. 수심은 160cm로 할머니의 키(150cm)보다 깊어 숨을 쉬기조차 어려웠다. 할머니는 우물 속에서 극한 공포감에 빠졌다. 할머니의 비명소리를 들은 정 할아버지는 우물로 뛰어갔다. 우물 속으로 손을 뻗었지만 할머니의 손을 잡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휴대전화조차 없어 119 신고도 할 수 없었다. 발을 구르며 할머니를 향해 손을 내밀던 할아버지는 한 뼘이라도 더 뻗기 위해 우물 속으로 몸의 절반 이상을 넣었다. “그러다 당신마저 빠진다”며 걱정하는 할머니의 우려에도 몸을 계속 아래로 뻗던 할아버지마저 머리를 아래로 향한 채 몸 전체가 우물 속으로 빠졌다. 그러나 운동화가 우물 돌벽 틈새에 걸려 할아버지는 우물 중간에 거꾸로 매달린 상태가 됐다.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향해 “할멈, 괜찮아?”라고 말을 걸었다. 노부부는 컴컴한 우물 속에서 서로의 안부를 확인한 뒤 우물 밖으로 나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할머니는 수면 위로 얼굴을 내민 채 우물 한쪽 벽면에 튀어나온 돌을 손으로 잡고 반대편 벽면을 엉덩이로 지지하며 버텼다. 할아버지는 우물 위쪽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이리저리 힘을 쓰다 끝내 정신을 잃었다.

그렇게 2시간 정도가 흘렸다. 우물 주변을 지나던 한 여성 주민(47)이 할머니의 “살려 달라”는 외침을 듣고 119에 구조전화를 했다. 이 여성은 우물 입구 쪽에 있던 할아버지부터 먼저 구했다. 이어 출동한 119구급대는 로프와 사다리로 할머니를 구조했다.

선경모 장흥119안전센터 소방교는 “구조 당시 김 할머니는 저체온 증세 등으로 괴로워했고 정 할아버지는 무릎 통증을 호소했다. 조금만 늦었더라도 생명이 위험할 뻔한 위기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노부부는 구조 직후 119구급대 차량으로 장흥 모 병원으로 이송됐다. 정 할아버지는 X선 촬영 결과 큰 부상은 아닌 것으로 확인됐다. 김 할머니도 병원에서 간단한 치료를 받고 안정을 되찾았다.

김 할머니는 약간 치매 증상이 있지만 정 할아버지는 그런 아내를 6년째 각별히 보살피고 있다. 할아버지는 “서울에 사는 7남매가 수시로 연락을 하면서 용돈을 보내줘 20년 전부터 농사를 짓지 않고 있다”며 “소일거리로 무를 심었는데 (우물에 빠지며) 주위에 걱정을 끼쳐 미안하다. 60년 넘게 산 아내를 구하려 한 것은 당연한 행동 아니냐”고 말했다.

장동면 주민들은 이 노부부가 평소에도 서로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다고 전했다. 마을 이장 정연승 씨는 3일 “이 노부부는 아침마다 손을 꼭 잡고 운동을 갈 정도로 금실이 좋다”며 “우물에 빠진 위기 속에서도 서로를 챙기는 모습에서 노부부의 지극한 순애보(純愛譜)를 느꼈다”고 말했다.

장흥=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노부부#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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