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 원룸 안에는 여자 단둘이 있었다. 두 여자는 한참을 다퉜고 한 여자가 떠난 뒤, 방에서 불이 났다. 다른 여자는 흉기에 목이 찔린 채 발견됐다. 병원으로 옮겨진 지 한 달도 안 돼 결국 그녀는 의식을 찾지 못하고 숨졌다. 목격자도 없고 확실한 증거도 없는 상황. 1심 재판부는 함께 사는 여자를 흉기로 찌르고 집에 불을 지른 혐의로 최모 씨(25)에게 징역 18년을 선고했다. 그러나 6개월 후인 9일 열린 항소심에서는 무죄 판결이 났다. 그날 밤, 그 방에서 벌어진 일의 진실은 무엇일까.
지난해 9월 17일 낮 12시경 서울 강남구 역삼동의 한 원룸에서 불이 나 119소방대가 긴급 출동했다. 방안 화장실에 정신을 잃은 A 씨(24)가 쓰러져 있었다. 속눈썹을 붙인 채 화장을 한 상태였던 A 씨의 양쪽 목에는 흉기에 찔린 상처가 발견됐고 같은 해 10월 3일 숨졌다.
검찰은 A 씨와 9개월가량 동거했던 최 씨를 범인으로 지목했다. 2007년 강남의 한 유흥업소에서 일하다 알게 된 둘은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다. 최 씨는 A 씨가 키우던 강아지에게 약을 먹여 죽게 하고, A 씨의 휴대전화로 A 씨의 친구들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내 이간질하기도 했다. 결정적으로 검찰은 A 씨가 발견되기 직전 주변 지인들에게 갑자기 4700만 원의 빚이 있다는 내용의 A 씨 명의 문자가 전달된 점을 주목했다.
평소 A 씨는 거액의 빚을 졌다는 얘기를 주변에 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A 씨의 친구와 동생은 A 씨에게서 지난해 9월 16일 오후 7시부터 다음 날 오전까지 “거액의 빚을 져서 차용증을 써야 한다”는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검찰은 최 씨가 A 씨를 흉기로 찌른 뒤 치명상을 입히지 못해 불을 지르고 집을 나서기 전까지 A 씨의 휴대전화를 이용해 이 같은 문자메시지를 보낸 것으로 결론 내렸다. A 씨가 가입한 4000만 원짜리 생명보험금을 노리고 마치 자신이 A 씨에게 거액을 빌려준 것처럼 가장했다고 본 것이다. 올해 5월 서울중앙지법은 검찰의 주장을 모두 인정하고 최 씨에게 징역 18년을 선고했다.
그러나 1심 판결 6개월 뒤인 9일 서울고법 형사7부(부장판사 윤성원)는 살인이 아니라 A 씨가 자해를 시도한 뒤 숨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A 씨가 나에게 돈을 빌린 뒤 갚을 능력이 없자 나를 설득하다 자해를 했다. 지혈을 해준 뒤 나는 집을 떠났고, 불은 그 후에 났다”는 최 씨의 주장이 사실일 가능성을 일부 인정한 것이다.
검찰은 둘 사이에 채무관계가 없었다고 주장하지만 2심 재판부는 “자존심 때문에 주위에 알리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며 “A 씨가 자해를 한 뒤 스스로 문자메시지를 보냈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이 과정에서 둘 사이에 우발적인 다툼이 벌어졌고 A 씨가 자해에 이어 스스로 불을 질렀을 수 있다고 봤다.
이어 재판부는 “유죄를 의심할 만한 여러 정황이 있지만 최 씨가 A 씨를 살해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며 “증거재판주의의 원칙에 따라 간접 증거만으로는 유죄를 선고할 수 없다”고 판결 이유를 설명했다.
검찰은 대법원에 상고하기로 했다. 뒤집힌 그날 밤의 진실은 결국 대법원 판결에서 밝혀지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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