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행 피해자를 합의하게 만든 ‘황당’ 사연은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4월 16일 03시 00분


해외 입양돼 한국어 못하는 피해여성
한국어 서툰 통역 실수로 ‘처벌 원치 않는다’ 서명
피의자 “합의했으니 감형”… 법원 “합의 무효” 실형

“성폭행 피해에 합의하고 민형사상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내용이라고 통역해줘요.”(경찰)

“합의서를 써 주고 합의금을 받아도 처벌에는 영향이 없다고 하네요.”(통역)

엉터리 통역 때문에 성폭행 피의자가 솜방망이 처벌을 받을 뻔했지만 법원이 피해자 의사를 정확히 파악해 실형을 선고했다.

서울 서부지법 형사11부(부장판사 김종호)는 한국어를 못 하는 피해자가 통역 요원의 잘못된 통역을 믿고 서명한 합의서를 근거로 형 감경을 주장한 성폭행 피고인 고모 씨(30)에게 징역 5년의 실형을 선고했다고 15일 밝혔다.

재판부와 경찰에 따르면 해외로 입양된 뒤 최근 귀국했다 성폭행을 당한 A씨는 경찰 조사에서 줄곧 ‘피의자를 처벌해 달라’고 했다. 한국어를 못 하는 A씨는 자신이 알고 지내던 이에게 통역을 부탁했다. 통역 요원은 해당 언어 사용 국가 거주 경험 등 일정 요건을 갖춰 경찰청에 등록한 뒤 자원봉사 형식으로 활동하지만 이를 활용하는 것은 강제가 아니라 경찰은 A씨의 의사를 반영해 통역 요원의 도움을 받도록 했다.

고 씨는 합의를 요구했다. 그러자 경찰은 ‘이 사건에 대해 원만히 합의했으므로 차후 이 일에 대해서는 어떠한 민형사상 책임을 묻지 않기로 합의한다’는 내용의 합의서를 통역 요원에게 보여줬다. 법률상 ‘합의’ 내용도 설명한 뒤 A씨 의사를 물었다.

하지만 통역 요원도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외국으로 입양됐다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한국어로는 일상 대화만 가능했다. 법률용어나 한국어 독해에 서툴렀던 통역 요원은 ‘합의서를 써 주고 합의금을 받아도 처벌에는 영향이 없다’고 잘못 설명했다. 이 설명을 들은 A씨는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합의서에 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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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의는 했지만 특수강간죄가 적용된 고 씨는 재판을 받게 됐다. 이 과정에서 그는 합의서를 근거로 “600만 원에 피해자가 합의했으니 법에 따라 형량을 줄여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피해자가 재판과 경찰조사에서 ‘엄벌을 원한다’고 한 점으로 미뤄 합의서는 잘못된 통역으로 인해 작성한 것으로 인정된다”며 고 씨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곽대경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정확한 통역을 위해서는 한 명의 통역사가 아닌 복수 통역인을 통한 교차확인, 대사관이나 대학과의 협력을 통한 인력 확보 등의 대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박성민 기자 min@donga.com  
박승헌 기자 hpark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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