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인권에 대한 인식을 제고하기 위한 국제회의가 서울에서 열린다. 국가인권위원회(위원장 현병철)는 아태지역국가인권기구포럼(APF)과 공동으로 11일부터 13일까지 서울 중구 남대문로 대한상공회의소에서 ‘기업과 인권 그리고 국가인권기구 역량강화’를 주제로 ‘아태지역 국가인권기구회의’를 개최한다.
이번 회의는 지난해 10월 영국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기업과 인권을 주제로 열린 제10차 세계국가인권기구대회에서 발표한 ‘에든버러 선언’의 후속 조치로 마련된 행사다. 에든버러 선언은 다국적 기업의 경제 활동이 인권에 막강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에서 기업의 책임 있는 업무 수행과 정부의 효과적인 규제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국가인권기구의 적극적인 활동을 제안했다.
이번 회의는 무히에덴 투끄 국가인권기구 국제조정위원회(ICC) 의장이 축사를 하고 아마라 퐁사피 아태지역 국가인권기구포럼 의장이 개회사를 한다. 최동규 한국생산성본부회장과 로슬린 누난 전 ICC 의장은 인권에 대한 기업의 책임과 국가인권기구의 역할에 대한 기조발제를 각각 발표한다. 40여 개국 국가인권기구 대표와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UNOHCHR) 등 국제기구 대표, 기업과 시민사회 국내외 전문가 200여 명도 참가해 기업과 인권에 관한 국제동향, 기업과 인권에 관한 유엔 등 국제기준 이행방안 등을 논의한다. 세계 5위 규모의 석유화학통합회사인 프랑스의 토탈사는 제3세계에서의 인권침해 경험에 대한 반성을 공유하고 국내 기업으로는 LG전자가 기업의 인권 존중 책임에 대해 발표한다.
마지막 날인 13일에는 3일간의 논의를 바탕으로 아태지역 국가인권기구들의 포괄적인 협력방안과 전략적인 행동지침이 담긴 ‘기업과 인권에 관한 아태지역 국가인권기구 성명서(서울선언)’를 채택한다. ▼ 국내 ‘인권 경영’ 걸음마… 인권위 적극 나서야 ▼
#1996년 라이프지 6월호에 뙤약볕 아래서 힘겹게 나이키 축구공을 꿰매는 한 파키스탄 어린이의 사진이 실렸다. 아동 노동 착취로 돈을 버는 악덕 기업으로 낙인찍힌 나이키는 이후 한동안 대대적인 불매 운동과 주가 폭락을 경험해야 했다. 나이키는 이후 모든 하청기업에 소년 노동을 전면 금지시키고 아웃소싱 단가를 최고 수준으로 올렸다.
#2002년 국제 비정부기구(NGO)인 ‘글로벌 익스체인지’는 스타벅스가 원두를 헐값에 매입해 커피 농부를 착취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스타벅스는 곧장 글로벌 익스체인지와 손잡고 커피 공정거래와 소규모 커피농가 보호 운동에 투자했다. 그 결과 포천지 선정 ‘존경받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 항목에서 2001년 37위에 그쳤던 스타벅스는 지난해 2위로 순위가 훌쩍 뛰었다.
○ 지금은 ‘기업 인권’ 시대
다국적 기업인 나이키와 스타벅스는 인권 문제를 간과했다가 혼쭐이 난 뒤로 인권 보호에 앞장서고 있는 대표적인 기업이다. 두 업체는 문제를 해결한 뒤에야 어렵사리 기업 이미지 회복에 성공했고 매출도 다시 상승했다.
이런 분위기는 국제사회와 글로벌 기업이 ‘기업 인권’ 이슈에 주목하는 계기가 됐다. 기업 인권은 기업의 경제 활동 과정에서 인권이 제대로 보호되는지를 살피는 것이 핵심이다. 노동자 인권부터 환경 보호, 지역사회에 대한 배려와 기여가 모두 포함된다.
특히 기업이 개인이나 공동체의 인권에 미치는 영향이 커지면서 국제사회는 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고 있다. 2000년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지지와 이행을 촉구하기 위한 국제협약 ‘유엔 글로벌 콤팩트’가 발족됐고, 기업의 인권 침해 요소를 법과 제도로 규제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결의문이 최근 유엔에서 채택되기도 했다.
소비자들의 인식과 기대치도 달라졌다. 미국의 사회책임경영 컨설팅업체인 콘로퍼가 최근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가격이 같다면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기업의 제품을 사겠다’는 응답이 1993년 66%에서 2004년 86%로 20%포인트나 올랐다. 2007년 LG경제연구원이 국내 성인 소비자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도 ‘품질이 같다면 사회적 책임을 잘 이행하는 기업의 제품을 더 비싼 값으로도 살 의향이 있다’는 응답이 전체의 88.7%나 됐다.
○ 아직 갈 길 먼 한국
국내 기업의 인권 의식은 아직 국제적 수준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여전히 적지 않은 외국인 노동자의 인권이 사각지대에 놓여 있고 여성 노동자에 대한 차별도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사옥 곳곳에 설치한 폐쇄회로(CC)TV가 직원들을 감시하는 기기로 악용되는가 하면 일부 대기업이 기밀 보호를 위해 건물 출입 시 가방을 검사하는 등 국제적 기준의 기업 인권 수준에 못 미친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선애 한국인권재단 사무처장은 “미국에서는 배달원의 안전 문제로 10년 전에 사라진 ‘30분 내 피자 배달 보장제도’가 국내에선 올해 들어서야 사라졌다”며 “기업 인권 이슈에 대한 공감대가 아직 미흡한 실정”이라고 말했다. 권영준 경희대 국제경영학부 교수는 “아직 노조를 적대적 단체로 바라보는 듯한 대기업이 있다는 게 국내 기업의 인권보호 수준을 단적으로 보여준다”며 “기업에서의 인권 존중이 장기적으로 회사 경영에 좋은 영향을 미친다는 인식이 확산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서이종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기업 인권을 존중하고 지키려고 노력하는 기업에 ‘인권마크’를 부여하는 등 인권위가 앞장서 인권 보장을 독려하고 권장하는 문화를 조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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