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집안서 차례 따로따로… 강정마을엔 ‘2개의 반달’이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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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9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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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군기지 찬반 갈등 여전… 썰렁했던 한가위

제주해군기지 반대단체 측이 중덕삼거리에서 강정마을 사거리까지 200∼300m 거리에 무허가 시설물을 설치하고 올레코스 탐방객 등을 상대로 음료수를 팔고 있다. 오른쪽 건물은 해군기지 찬성 측 주민이 운영하는 편의점으로 골목을 사이에 두고 있다. 서귀포=임재영 기자 jy788@donga.com
제주해군기지 반대단체 측이 중덕삼거리에서 강정마을 사거리까지 200∼300m 거리에 무허가 시설물을 설치하고 올레코스 탐방객 등을 상대로 음료수를 팔고 있다. 오른쪽 건물은 해군기지 찬성 측 주민이 운영하는 편의점으로 골목을 사이에 두고 있다. 서귀포=임재영 기자 jy788@donga.com
서로 모르는 사람도 한 다리만 건너면 친인척인 제주도. 그래서인지 제주도에는 육지엔 없는 ‘궨당(친척을 뜻하는 제주 사투리) 문화’가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다. 지역 주민의 결속력이 유독 강한 이유도 이 때문.

하지만 갈등이 쌓이고 쌓인 제주 서귀포시 강정마을에서는 ‘민족 최대 명절’인 추석 연휴에도 시끌벅적함과 웃음소리가 사라져 버렸다. 기자가 찾은 강정마을엔 추석 당일인 13일조차 올레길 탐방객들만 띄엄띄엄 보일 뿐 명절 느낌은 들지 않았다. 차례를 지낸 집에서 새어나온 음식 냄새만이 그나마 지금이 추석이라는 사실을 알려줄 뿐이었다.

강정마을에는 여느 평범한 마을처럼 입구에 ‘고향 방문을 환영합니다’라는 현수막조차 없었다. 대신 거리를 채우고 있는 것은 ‘해군기지 절대 반대’, ‘불순세력 해군’, ‘민군복합형 범죄자양성소’ 등의 깃발과 낙서가 대부분이었다.

○ 쪼개진 마을

예년 같으면 강정마을은 추석을 전후해 강정초등교 운동장에서 마을 전체가 떠들썩할 정도로 민속놀이와 체육대회가 열렸다. 한때는 부녀회 청년회 등의 주관으로 마을 어르신들 여행을 보내준 적도 있을 정도로 화목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득한 옛이야기가 됐다. 추석 연휴 기간에도 길에서 마주친 주민들은 눈인사만 주고받을 뿐 대부분 무표정이었다.

해군기지 공사가 시작됐지만 경찰과 기지건설 반대 측의 대치는 여전했다. 반대단체 측은 중덕삼거리에서 강정마을 사거리까지 200∼300m 거리에 천막 등 무허가 시설물을 설치하고 올레 탐방객 등을 상대로 해군기지 반대 서명을 받고 있었다.

서울에서 고향을 찾아온 윤모 씨(51)는 “마을 어르신을 찾아 인사를 드리기도 어색하고 친구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편하지 않다”며 “이웃끼리 평생 원수로 지낼 듯 대하는 것을 보니 가슴이 너무 먹먹했다”고 말했다.

강정마을에서 나오는 ‘강정쌀’은 수확철이면 전국 각지에서 상인들이 몰려올 정도로 유명했다. 이때가 되면 마을은 온통 벼에서 나오는 구수한 향기로 가득 찼다. 주민 김모 씨(55)는 “쌀은 여전히 나오고 있지만 대부분 추억의 향기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며 “서로 감정이 쌓일 대로 쌓여 마음의 여유가 없는 탓”이라고 안타까워했다.

강정마을의 갈등의 골은 2007년 4월 주민들이 해군기지 유치를 선언한 뒤 반대 주민들이 이를 부정하고 나서면서 벌써 4년 반이나 파일 대로 파인 상태다. 급기야 한집안에서도 명절, 제사를 따로 지내는 집까지 생겼다. 친척은 물론이고 형제끼리 갈라선 집이 있는가 하면 찬성 측 주민들이 낸 결혼 축의금을 반대 측 주민이 돌려주는 일까지 벌어졌다.

포구에서 만난 김모 씨(60)는 “마을 동갑내기들의 모임인 ‘갑장(甲長)회’는 깨진 지 오래됐고 각종 친목회 부녀회 등도 거의 모임이 없다”며 “과거 지방선거 등이 있을 때 서로 감정이 상한 적은 있지만 이번처럼 심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 “우리 스스로 해결하도록 놔두세요”

아직은 감정의 골이 깊게 파인 상태지만 최근 불법농성에 대한 공권력 투입 및 반대 측 핵심 인사들의 잇따른 검거 등으로 반대 측의 활동이 위축되면서 조금씩 변화의 모습도 보이고 있다. 반대 활동을 하던 주민 중 일부가 중립으로 돌아서기 시작한 것. 현재 반대단체의 모임에 나가는 주민은 10명 미만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때 반대 활동을 했던 한 주민은 “해군기지 유치 과정의 절차적 하자 때문에 반대했지만 외부 세력이 개입하면서 정치 문제로 변질됐다”며 “협상이나 타협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백지화를 주장하는 등 극한으로 치달아 환멸을 느꼈다”고 말했다.

반면 기지건설에 찬성하거나 중립적인 주민들은 반대 측 주민들을 자극하지 않도록 조심하는 모습이다. 강모 씨(62)는 “우리에게 해군기지는 이념이 아니라 명분과 생존 문제였다”며 “반대하는 주민들 입장도 이해하기 때문에 더는 막다른 절벽으로 몰아세우지 말고 포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강 씨는 “외부에서 들어온 반대세력이 주민 간 갈등을 더욱 부채질하고 있다”며 “그들이 떠나면 우리끼리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다.

주민 고모 씨(47)는 “외부 세력만 떠나면 주민끼리 구속인사 석방, 주민 벌금 면제 등을 논의하며 그동안 쌓인 앙금을 풀어낼 수 있다”고 말했다.

한편 강정마을 공권력 투입을 항의하며 5일부터 제주도의회에서 단식농성을 벌인 제주도의회 의원 5명은 13일 단식농성을 중단했다. 강경식(민주노동당), 박주희(국민참여당), 박원철, 윤춘광(이상 민주당), 이석문(교육의원) 의원은 이날 보도자료를 내고 “공권력 투입 사과와 경찰병력 완전 철수, 구속자 석방 등을 요구하며 단식농성을 벌였지만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했다”며 “15일부터 열리는 임시회에서 해군기지 문제 해결에 전념하겠다”고 밝혔다.

○ 해군 “마을공동체 회복 성의껏 지원”

해군은 추석 연휴가 끝난 14일부터 공사를 재개한다. 해안가 암반을 깨는 작업을 시작으로 방파제용 대형 콘크리트 구조물인 ‘케이슨’ 제작장을 설치할 예정이다. 해상에는 오폐수를 막는 울타리도 설치된다. 해군은 반대 측에 16일까지 공사장 내 있는 불법 시설물을 철거해줄 것을 요청한 상태다.

반면 반대 측은 다음 달 1일 강정마을에서 또다시 문화제를 열 계획이다. 내륙에서 기지건설 반대 인사 등을 태우고 제주로 오는 이른바 ‘평화비행기’를 띄우고, 제주지역에서는 ‘평화버스’를 운행한다는 방침이다.

이은국 제주해군기지사업단장(대령)은 “마을공동체 회복을 위해 성심성의껏 지원할 것”이라며 “법에 따라 불법 시설물을 철거해야 하지만 마을 주민이 다치는 불상사가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서귀포=임재영 기자 jy788@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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