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부고속도로 개통 40년]“무모한 모험” 비판 뚫고 大役事…‘할 수 있다’ 인식혁명 길을 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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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7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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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 대동맥 70년대 고속도로 시대… 물류혁명-고속성장 견인
한국 넘어 세계로 아시안 하이웨이 중심축… “스마트 도로로 재탄생”

완전 개통되기 반년 전인 1969년 12월 하늘에서 내려다본 경부고속도로 대전나들목. 검은 띠 모양의 고속도로가 인적 없는 논밭을 가로질러 뻗어 있다. 아래 사진은 한 인부가 대전공구 현장에서 발파돼 나온 바위를 드릴로 부수는 모습.동아일보 자료 사진·사진 제공 한국도로공사
완전 개통되기 반년 전인 1969년 12월 하늘에서 내려다본 경부고속도로 대전나들목. 검은 띠 모양의 고속도로가 인적 없는 논밭을 가로질러 뻗어 있다. 아래 사진은 한 인부가 대전공구 현장에서 발파돼 나온 바위를 드릴로 부수는 모습.동아일보 자료 사진·사진 제공 한국도로공사
《“산을 뚫고 벼랑을 깎기 2년 5개월, 굽이치는 강물 위에 다리를 놓고 험준한 계곡을 흙으로 메워 전장 428km. 남북을 가로지르는 간선 대동맥, 경부고속도로 전 구간이 마침내 개통, 속도혁명에의 거보를 내디뎠다.”(1970년 7월 7일자 동아일보 1면 기사) 서울과 부산을 잇는 우리 국토의 혈맥인 경부고속도로가 7일로 개통 40년을 맞는다. 경부고속도로는 단순히 자동차가 오가는 콘크리트 구조물이 아니었다. 대한민국 경제발전과 근대화의 견인차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전국을 1일 생활권으로 묶어 경제 사회 문화 등 국가 전반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이동 시간을 단축한 속도의 혁명에 머무르지도 않았다. 대규모 국책사업과 국토 개조에 대한 국민의 생각을 바꿔 ‘인식 혁명’의 토대를 닦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 국책사업에 대한 생각을 바꾸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단군 이래 최초의 대규모 국책사업으로 불린다. 6·25전쟁의 폐허에서 가까스로 벗어난 당시의 경제력과 기술력을 고려하면 무모한 도전이라는 비판도 무리는 아니었다. 건설을 추진하던 1967년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142달러에 불과했다. 경부고속도로 공사비 429억7300만 원은 1967년 국가예산의 23.6%나 됐다. 1966년 말 현재 국도 및 지방도 포장률은 5.6%, 자동차 등록대수는 고작 5만 대였다. 고속도로는 꿈에서나 가능할 법한 계획이었다.

부족한 장비와 기술, 77명의 희생으로 일궈낸 경부고속도로의 신화는 국가의 경제계획과 대형 국책사업에 대한 인식의 틀을 바꾼 전환점이었다. 막연한 두려움과 패배감에서 벗어나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국민들에게 불어넣었다. 당장은 힘들더라도 대역사(大役事)를 이뤄내면 국가 전체가 바뀌고 국민 개개인에게 엄청난 편익이 돌아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계기였다.

특히 고속도로 건설을 통한 기술력의 확보와 경험은 이후 대형 국책사업 추진의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공간거리를 획기적으로 단축한 고속철도 프로젝트, 동북아시아 항공허브로 도약한 인천국제공항 사업, 서울 면적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국토를 확보한 새만금 간척 사업 등도 경부고속도로의 성공에서 출발한 셈이다.

박양호 국토연구원 원장은 “경부고속도로는 국가발전의 동력이 되는 국책 프로젝트를 국민과 함께 연착륙시켜 미래 국가발전을 선도한 사례”라며 “경부고속도로의 성공으로 국민들도 당장의 이익이 아닌 20∼30년 뒤의 미래, 자기 지역만이 아닌 국가의 생산성을 함께 생각하게 돼 국책사업에 대한 시간적, 공간적 인식 범위가 넓어졌다”고 말했다.

야당과 일부 언론은 막대한 돈을 들여 고속도로를 뚫는다는 생소한 계획에 반대했다. ‘국가재정이 파탄난다’ ‘일부 부유층의 유람로가 될 것’이라는 식의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차라리 그 돈으로 공장을 짓고 일자리를 만드는 게 효과적이라는 의견도 나왔다.

1964년 서독을 방문해 전후 독일의 경제부흥과 아우토반의 관계에서 영감을 받은 박정희 대통령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사회간접자본을 확충해 수출형 공업 중심으로 산업구조를 개편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아무리 물건을 만들어도 서울에서 부산까지 꼬박 하루가 걸릴 정도로 물류가 막힌다면 산업 활성화는 요원하기 때문이다.

○ 연간 경제효과 139조 원

경부고속도로는 국토공간을 획기적으로 단축해 본격적인 자동차 시대를 열었고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경제발전의 초석을 닦았다. 류철호 한국도로공사 사장은 “경부고속도로의 완공은 농경사회에서 현대 산업사회로 가는 전환점이 됐다”고 평가했다.

경부고속도로 개통은 본격적인 고속도로 시대를 열었다. 1967년부터 10년간 경인 경부 호남 남해 구마 영동고속도로 등 총 1300km가 연결됐다. 남북 7개축, 동서 9개축의 격자형 간선도로망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됐다. 이동시간도 크게 줄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전에는 서울에서 부산까지 15시간이나 걸렸지만 지금은 4시간 20분만 달리면 된다.

고속도로 이용 차량이 매년 크게 증가하면서 한국 자동차산업이 세계 5위로 도약하는 밑거름이 됐다. 경부고속도로 개통 전 9000여 대에 불과했던 하루 고속도로 통행량은 지난해 말 현재 331만 대로 증가했다. 자동차 등록대수는 1970년 12만 대에서 올해 5월 말 현재 1750만 대로 늘었다.

경부고속도로를 따라 형성된 경부 축을 중심으로 각종 산업단지가 들어서면서 물류혁명과 함께 경제성장의 기틀이 마련됐다. 국토연구원에 따르면 2005년까지 구축된 전체 고속도로망이 국가경제에 미치는 직접효과는 연간 139조2641억 원에 이른다.

경부고속도로는 국민들의 생활패턴, 여가 등 사회적 측면에서도 큰 영향을 끼쳤다. 대도시로 인구가 집중되면서 도시화가 촉진됐고 관광산업 발전에도 기여했다. 심리적인 거리감을 줄이는 효과도 컸다. 다만 자동차 중심의 도로교통을 고착시켰고, 21세기 신(新)교통수단으로 다시 떠오르고 있는 철도망에 대한 투자가 부족했던 점은 보완과제로 남아있다.

○ 지능형 최첨단 도로로 변신

경부고속도로는 이제 한국을 넘어 아시아 물류의 중심을 꿈꾸고 있다. 아시아 육상교통 인프라의 하나인 ‘아시안 하이웨이(AH·32개국 55개 노선·14만 km)’ 가운데 경부고속도로는 일본과 한반도, 중국을 잇는 ‘AH1 노선’의 중심축 역할을 하게 된다.

첨단기술이 장착되는 변신도 시도하고 있다. 도로공사가 추진하는 ‘스마트 하이웨이’는 도로 분야에 첨단 정보기술(IT)뿐만 아니라 자동차 연계기술을 융합한 지능형 도로다. 2017년까지 완성되면 앞차와 뒤차의 직접 통신은 물론 간격 자동조절도 가능해진다. 도로공사 관계자는 “스마트 하이웨이가 완성되면 산업생산 유발효과가 약 5조 원에 이르며 3만여 명의 고용을 창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재영 기자 redfoot@donga.com


77명 희생… 7월 7일 개통  1970년 7월 7일 경부고속도로 개통식에서 기념테이프를 끊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 오른쪽이 영부인 육영수 여사, 박 대통령 왼쪽은 이한림 당시 건설부 장관이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77명 희생… 7월 7일 개통 1970년 7월 7일 경부고속도로 개통식에서 기념테이프를 끊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 오른쪽이 영부인 육영수 여사, 박 대통령 왼쪽은 이한림 당시 건설부 장관이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 정주영 “비싸도 빨리 굳는 시멘트 써라” ▼
청와대도 힘들다 했던 터널 제때 완공
난공사 당재터널 감독 심완식 씨


“청와대조차 ‘당재터널’만큼은 기간 내에 못 뚫을 거라고 하기에 건설사들이 주판을 엎어두면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당시 대전공구 주감독이었던 심완식 씨(72·동구학원 이사·사진)는 40년 전 당재터널(현 옥천터널) 현장을 진두지휘했던 상황을 어제 일처럼 또렷하게 기억했다. 육군본부 공병감실 대위였던 심 씨는 당재터널 공사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공로를 인정받아 당시 영관급에게만 수여하던 4등 보국훈장을 받았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사무소에 파견된 육군 및 건설부 출신 공사 감독관들이 경부고속도로 개통일인 7월 7일을 따서 붙인 모임 ‘77회’ 회원이기도 하다.

당재터널은 경부고속도로 전체 공사현장 중 가장 힘들었던 곳으로 꼽힌다. 심 씨가 1969년 처음 대전에 내려갔을 때는 공사현장까지 가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차량 진입로를 만드는 데만 몇 달이 걸렸다. 더구나 터널구간이 지반이 약한 퇴적층이라 발파를 하면 천장이 무너지기 일쑤였다. 경부고속도로를 만들다 숨진 77명 중 당재터널 현장에서만 9명이 희생됐다. 그는 “임금을 몇 배 더 준다고 해도 일을 하겠다는 인부가 없었다”며 “아무리 힘들어도 박정희 대통령이 정한 6월 말까지 무조건 해내야 하는 상황이었다”고 떠올렸다.

심 씨는 1970년 4월 이한림 건설부 장관이 현장을 방문했을 때의 일화를 소개했다. 그는 “정식 브리핑에서 도저히 6월 말까지 완공할 수 없다는 말을 꺼내지 못했지만 이 장관도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며 “나중에 나만 따로 불러 어려운 점을 말하라고 했다”고 털어놓았다. 심 씨는 이 장관에게 건설사들이 이익에 연연하지 않고 최대한 협조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주판을 엎으라’는 말의 속뜻이었다. 공사를 맡았던 정주영 현대건설 회장이 결단을 내려 비싸지만 보통 시멘트보다 20배 빨리 굳는 조강시멘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결국 1970년 7월 7일로 예정된 준공식을 10여 일 앞둔 6월 27일에 터널을 완공했다.

심 씨에게 경부고속도로 완공은 평생 최대의 자부심이다. 그는 “경부고속도로의 가장 큰 의미는 국민들에게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심어준 것”이라며 “당시 ‘그런 돈 있으면 국민들을 먹여 살리라’고 반대한 정치인이 많았지만 결국 경부고속도로가 경제발전의 초석이 돼 풍요로운 삶을 제공하지 않았느냐”고 반문했다.

김철중 기자 tnf@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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