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D수첩 합의부 배당 검토했지만 사회적 논란 불가피해 안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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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2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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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재 서울중앙지법원장 인터뷰

“광우병 왜곡보도 혐의(명예훼손)로 기소된 MBC PD수첩 제작진의 재판을 형사단독 판사가 아닌 재정합의부(단독 판사 3명으로 구성된 재판부)로 넘기려고 법률 검토를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판결이 어떤 쪽으로 나든 논란이 될 사건의 담당 재판부를 바꾸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했습니다.”

이인재 서울중앙지법원장(56·사법시험 19회)은 최근 무죄 판결로 논란을 빚은 PD수첩 사건을 재정합의부로 넘기지 못한 이유에 대해 이같이 밝혔다. 그는 또 “지금처럼 법관의 처우가 낮은 상황에서 경력법관제를 확대하면 자칫 법관의 수준을 하락시켜 양질의 사법시스템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 법원장은 법원행정처 인사관리심의관과 사법정책연구실장 등 법원 내 요직을 두루 거친 전형적인 ‘엘리트 법관’이다. 그가 관장하고 있는 서울중앙지법은 중요 사건 대부분이 몰리는 국내 최대 법원이다. 이 법원장은 지난달 29일 서울 서초구 서초동 법원장실에서 동아일보와 단독 인터뷰를 가졌다.

판결 시비 어떻게 생각하나
상급심 중이니 언급할 사안 아냐
법관 2400명 의견 다 달라… 대법원 최종 판단 지켜보자


이인재 서울중앙지법원장이 1월 29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 법원장실에서 최근 MBC PD수첩 무죄판결 등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란에 대한 견해를 밝히고 있다. 전영한 기자
이인재 서울중앙지법원장이 1월 29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 법원장실에서 최근 MBC PD수첩 무죄판결 등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란에 대한 견해를 밝히고 있다. 전영한 기자
―전임자였던 신영철 대법관이 재판 개입 논란에 휘말렸을 때 서울중앙지법원장 자리에 올라 쉽지 않은 1년 임기를 보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 사태를 어떻게 보십니까.

“법원장의 사건 배당과 사무 분담 권한은 명확히 다릅니다. 사건 배당은 법원장의 의사가 개입할 여지가 허용되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과거에는 은행알 추첨으로, 현재에는 컴퓨터를 통해 기계적인 사건 배당을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법관을 특정 재판부에 배정하는 사무 분담은 인사권의 연장으로 법원장의 재량에 속합니다. 이런 차원에서 지난해 벌어진 재판 개입 논란은 대법원이 인정했듯이 일부 잘못된 사건 배당 사례로 보입니다.”

―PD수첩 사건같이 사회적 파장이 큰 사건은 형사단독 판사가 아닌 재정합의부로 회부할 수 있다는 규정이 있는데 왜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까.

“사건 배당권을 침해한다는 우려 때문에 법원장들이 재정합의제도를 관례상 시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PD수첩 등 중요 사건에 재정합의제를 검토했지만 판결이 어떻게 나든 논란이 있을 텐데 담당 재판부가 변경되는 모양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봤습니다.”

―대법원은 형사단독 판사 제도의 대안으로 재정합의부 활성화를 제시했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재정합의부로 넘길 수 있는 기준을 좀 더 명확히 하는 방향으로 재판 예규를 고쳐야 합니다. 그래야 법원장들이 과감하게 제도를 활용할 수 있을 겁니다.”

―형사단독 판사의 경력을 10년차 이상으로 높여야 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습니다.

“현재 서울중앙지법의 경우 형사단독 판사의 평균 경력은 8년 정도 됩니다. 변호사업계 불황과 여성 법관의 급증으로 법원은 조만간 고령화로 접어들기 때문에 경력 문제는 쉽게 해소됩니다. 경력 상향보다는 판사들의 재교육을 활성화해 재판의 질을 높여야 합니다.”

이 법원장은 최근 판결 시비가 불거진 PD수첩 사건이나 강기갑 민주노동당 대표의 국회 폭력 사건의 무죄 선고에 대해선 “상급심이 진행 중이라 언급할 사안이 아니다”라고 전제한 뒤 “전국 2400여 명의 법관마다 다양한 의견이 혼재할 수 있으니 대법원의 최종 판단이 나올 때까지 지켜보자”고 말했다.

―대법원이 5년 이상 경력의 검사나 변호사 가운데 법관을 선발하는 경력법관제도를 확대 시행하려고 준비 중입니다.

“지금처럼 법관의 처우가 낮은 상황에서는 미봉책에 불과합니다. 로스쿨을 졸업한 우수한 법조인이 대형 로펌에서 높은 연봉을 받으며 근무하다가 몇 년 뒤 처우가 낮은 법관으로 지원할 가능성은 매우 낮습니다. 법원에 우수인력들이 몰리지 않으면 국민은 법원을 믿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법연구회 등 모임은
법원 학술모임은 더 권장돼야
일부 조직 폐쇄적… 세력화 우려
스스로 외부에 공개해 오해 없애야


―어떤 대안이 있을까요.

“미국의 예를 보더라도 훌륭한 경력법관을 뽑으려면 변호사 수가 법관의 10∼15배는 돼야 합니다. 하지만 한국 변호사 수(약 1만 명)는 판사의 4배에 불과합니다. 과도기에는 우수한 로스쿨 졸업생을 재판연구관으로 많이 확보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또한 법관의 처우가 좋아져야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법연구회나 민사판례연구회 등 일부 법원 내 학회가 사조직화되고 있다는 우려가 많습니다.

“법원 내 학술모임은 더욱더 권장돼야 합니다. 하지만 일부 모임은 가입이 제한돼 있고 조직 자체가 폐쇄적이라 세력화할 가능성이 높아 걱정입니다. 스스로 모임을 외부에 공개해 오해의 소지를 없애야 합니다.”

이념적 성향을 띠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우리법연구회나 법원 내 엘리트 모임으로 통하는 민사판례연구회 등은 모두 사법연수생 시절 특정 성향을 보이거나 성적이 좋은 우등생을 미리 점찍어 회원으로 선발해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 모임은 최근 들어 회원 가입 조건을 완화하고 있지만 폐쇄성에 대한 비판은 여전하다.

이 법원장은 2월 초 30여 년의 법관 생활을 마무리하고 한 로펌에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한다. 그는 후배 법관들에게 “스스로 완성된 존재라는 생각을 버리고 배운다는 자세를 가져 달라”며 “선배 법관들도 무관심에서 벗어나 후배들을 가르치는 데 힘써 선후배 간 소통의 통로를 더욱 넓혀 달라”고 조언했다.

이종식 기자 bell@donga.com

신광영 기자 neo@donga.com

※인터뷰 동영상은 오늘 오후 5시 동아닷컴 뉴스스테이션(station.donga.com)에서 시청할 수 있습니다.:: ● 이인재 서울중앙지법원장 ::

-부산 출신(56세)

-부산고, 서울대 법대 졸업

-사법시험 19회

-법원행정처 사법정책연구실장

-서울행정법원 수석부장판사

-인천지법원장

-서울동부지법원장

-현 서울중앙지법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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