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엄사 논란 金할머니 인공호흡기 제거 201일만에 별세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1월 11일 03시 00분


국내 최초로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 판결을 받았던 김옥경 할머니(78)가 인공호흡기를 제거한 지 201일 만인 10일 오후 사망했다. 김 할머니는 지난해 6월 23일 인공호흡기를 제거한 뒤 곧 사망할 것이라는 의료진의 예측과 달리 6개월 넘게 자발 호흡으로 생명을 이어왔다.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은 이날 서울 서대문구 신촌동 병원 종합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김 할머니가 10일 오후 2시 57분 신부전증 등 다발성 장기부전으로 별세했다”고 밝혔다.

‘존엄한 생명’은 7개월만에 ‘존엄한 죽음’에 길을 내줬다



金할머니 죽음의 의미
‘연명치료 중단’ 공론화

힘겨웠던 가족들

“일주일 전부터 마음의 준비”

남겨진 과제는…
존엄사 제도화까진 먼길


10일 오후 4시 박창일 연세대 의료원장(가운데)이 김옥경 할머니의 사망에 대해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박 원장은 “김 할머니가 폐와 신장 기능이 떨어지는 다발성 장기부전으로 숨졌다”고 밝혔다. 김재명 기자
10일 오후 4시 박창일 연세대 의료원장(가운데)이 김옥경 할머니의 사망에 대해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박 원장은 “김 할머니가 폐와 신장 기능이 떨어지는 다발성 장기부전으로 숨졌다”고 밝혔다. 김재명 기자
김 할머니의 주치의인 박무석 호흡기내과 교수는 “오전 11시 반경 김 할머니의 산소포화도가 82%로 떨어지고, 호흡수는 분당 44회로 높아져 가족에게 임종을 준비하라고 연락했다”며 “지난해 12월 말부터 소변량이 줄어드는 등 신장 기능이 약해지고 폐가 부어 호흡이 힘들어졌다”고 설명했다. 김 할머니의 맏사위 심치성 씨(50·사업)는 “일주일 전부터 상태가 악화돼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며 “가족이 모두 모여 임종했다”고 말했다.

빈소는 이 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고 김 할머니의 정확한 사인을 밝히기 위해 오늘 오전 부검을 실시할 예정이다.

▽연명치료 중단 과정=김 할머니는 2008년 2월 세브란스병원에서 내시경으로 폐 검사를 받다가 폐혈관이 터지면서 의식불명 상태에 빠졌다. 병원은 인공호흡기를 부착한 뒤 연명치료에 들어갔다. 김 할머니 가족은 2008년 5월 법원에 영양공급을 중단하고 응급심폐소생술을 못하게 해달라는 가처분 신청을 하고 인공호흡기를 제거해 달라는 소송을 함께 제기했다.

가처분 신청은 기각됐지만 서울서부지법 재판부는 병원 현장검증, 서울대병원과 서울아산병원의 환자 상태 감정을 거친 뒤 인공호흡기 제거 판결을 내리면서 존엄사 논란을 불렀다.

대법원은 지난해 5월 “환자가 연명치료를 원하지 않으면 인간답게 죽을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며 인공호흡기 제거를 명한 원심 판결을 확정해 연명치료 중단을 법적으로 허용했다. 대법원은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에 대해 본인이 의료진의 판단에 우선해 결정할 수 있다(자기결정권)는 원칙을 제시했다. 법원은 김 할머니가 5년 전 남편이 심근경색으로 숨질 때 연명치료를 반대한 것을 본인의 의사로 추정했다.

세브란스병원은 지난해 6월 23일 오전 10시 21분 주치의 박 교수가 김 할머니의 인공호흡기를 떼며 국내 최초로 존엄사를 시도했다. 의료진은 김 할머니가 몇 시간 이내로 숨을 거둘 것으로 내다봤지만 김 할머니는 스스로 호흡하며 삶을 이어가 또다시 국민적 관심의 대상이 됐다.

▽김 할머니 죽음의 의미=김 할머니 사건은 그동안 쉬쉬하며 이뤄지던 연명치료 중단과 관련해 법적 제도적 기준 마련에 출발점이 됐다. 지난해 7월 한국보건의료연구원은 존엄사란 용어 대신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이란 말을 쓰기로 했고 심폐소생술과 인공호흡기 부착 외에 영양공급 등의 연명치료는 의학적 판단과 환자의 가치관을 고려해 결정한다는 기준을 마련했다. 대한의사협회도 지난해 10월 자체 지침을 만들었다.

하지만 각 단체가 만든 지침들은 사회적, 법적으로 합의한 사항이 아니어서 현장에서 사용할 수 없었다. 보건복지가족부는 각계 전문가 20명이 모인 가칭 ‘연명치료 중단 추진 협의체’를 구성하고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법에 반영하기로 했으나 지난해 12월 1차 회의를 마친 정도다.

연명치료 중단은 △대상자를 말기 암, 식물인간 등 어디까지 인정할 것인가 △사전의료 지시서를 남기지 않은 환자의 의사 표시를 어디까지 인정해야 하는가 △인공호흡기 사용, 영양공급 등 연명치료 중단 범위를 어디까지 인정할 것인가 등 논란거리가 적지 않다.

윤영호 국립암센터 암관리연구과장은 “김 할머니 사건은 식물인간이나 말기 암 환자 등이 어떻게 하면 존엄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지에 대해 논의하는 계기가 됐다”며 “웰다잉을 위해 호스피스 제도를 활성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연명치료 중단 추진 협의체 일원인 허대석 서울대병원 종양내과 교수(한국보건의료연구원 원장)는 “환자 입장에선 인공호흡기 같은 고통스러운 기기에서 벗어나 임종한 것이 낫다고 할 수 있다”며 “현재 국회의원이 발의한 법안과 각 단체의 가이드라인을 검토해 연명치료에 대한 최종안을 만들겠다”고 말했다.
이진한 기자·의사 likeday@donga.com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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