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입력 2009년 9월 28일 03시 04분
공유하기
글자크기 설정
누가 마리 앙투아네트를 제대로 안다 하는가
베르사유는 시골마을이었다. 인구도 적었을 뿐더러 교통의 요지가 될 만한 큰 강도, 길도 없었다. 그럼에도 이곳에 루이 14세의 화려한 궁전이 자리 잡았다. 왜 그랬을까? 이유는 간단했다. 왕이 원했기 때문이다. “짐이 곧 국가다”라는 루이 14세의 당당한 선언 앞에 맞설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국왕의 힘이 가장 강했던 루이 15세 때 프랑스의 왕세자비가 되었다. 그녀 자신도 오스트리아 제국의 여제(女帝)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이었다. 왕궁의 딸로 태어나 다른 제국의 왕비가 되었으니, 당연히 무서울 게 없었겠다.
그녀는 아름답기까지 했다. ‘잿빛 블론드의 풍성한 머리채, 백자빛의 살결, 매끈한 얼굴, 풍만하면서도 부드러운 몸매에 상아처럼 매끄러운 팔의 완벽한 선….’ 프랑스는 앙투아네트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었다.
하지만 그녀가 루이 16세의 왕비가 되자, 인기는 금세 원망으로 바뀌어 버렸다. 그녀는 ‘로코코의 여왕’이라 할 만했다. 로코코는 화려함과 사치스러움으로 유명한 예술양식이다. 발랄했던 앙투아네트는 유행을 이끌었고, 숱한 귀족들이 왕비의 생활을 좇았다. 그럴수록 낭비의 규모는 점점 커졌다.
더 심각한 문제는 그녀가 왕비의 의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는 데 있었다. 귀족과 힘 있는 이들은 베르사유에 모여 살았다. 왕과 왕비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권력을 지키려면 사람의 마음을 사야 했다. 그러려면 끊임없이 사람들을 만나 개개인에게 관심을 기울여야 했다. 하지만 철없는 20대 왕비는 그러지 않았다. 유쾌한 친구들과 트리아농이란 작은 궁전에서 지냈을 뿐이다. 더는 얼굴을 보이지 않는 왕비, 귀족과 권력자들은 루이의 왕궁에서 멀어졌다.
백성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루이 16세가 다스리던 12년 동안, 나라 빚은 12억5000만 리브르에 이르렀다. 이럴 때 사람들은 머리 아프게 복잡한 경제법칙이나 정치적 관계를 따져보지 않는다. 대신, 모든 문제의 뿌리가 될 만한 사람을 찾아내어 희생양으로 삼는다. 앙투아네트는 ‘적자(赤字) 부인’으로 비아냥거림을 당했다. 그럼에도 합스부르크 왕가의 자부심이 몸에 밴 그녀는 길거리 뒷말에 전혀 관심을 쏟지 않았다.
혁명의 기운은 무르익어 갔다. 반역의 지도자들은 왕과 왕비를 비난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존경을 받곤 했다. 그들 자신도 썩고 뒤가 구린 인물들이었는데도 말이다. 왕비의 이름을 팔아 사기를 일으킨 여인마저도 사람들의 동정을 살 정도였다.
1789년 7월 14일, 왕권의 상징이었던 바스티유 감옥이 무너졌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끝없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앙투아네트는 그 순간부터 비로소 왕비다워졌다. 그녀는 단두대에 올라서는 순간까지도 의연했다. 살려 달라며 매달리지도 않았다. 프랑스 왕비에게 은혜를 베풀었다는 ‘영광’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어느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불행 속에서야 인간은 겨우 자기가 누구인지 알 수 있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평가는 크게 엇갈린다. 왕국을 무너뜨린 쪽은 그녀를 ‘방탕한 오스트리아 여인’으로 밀어붙였다. 반면, 후에 왕권을 다시 세운 측은 그녀의 미덕을 찬양하느라 열심이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는 그녀를 ‘제대로’ 볼 수 없다. 최고의 전기 작가로 꼽히는 슈테판 츠바이크는 섬세하게 자료를 추려내 마리 앙투아네트를 눈으로 직접 본 듯이 살려냈다.
시대를 꿰뚫는 냉철한 눈이 없을 때, 사람들은 누군가를 동정할 가치 없는 악마로 비난하곤 한다.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쏟아졌던 시대의 비난처럼, 우리들 자신도 누군가에게 눈먼 독설을 퍼붓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역사의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해볼 일이다.
▶지난 기사와 자세한 설명은 easynonsul.com
안광복 중동고 철학교사 철학박사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