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학사정관 전형’ 자기소개서의 비밀

  • 입력 2009년 3월 18일 03시 00분


서울대-하버드대 합격 두 학생의 소개서 엿보기

《올해 대학입시 최대 화두는 ‘입학사정관제’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대학마다 입학사정관 전형 선발 인원을 지난해에 비해 대폭 늘리고 있기 때문이다. 입학사정관 전형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요소는 뭘까. 동아일보가 지난달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등 11개 주요 대학의 입학사정관 51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전형요소 중 점수를 가장 많이 할애한 부분은 자기소개서였다. 그렇다면 어떤 자기소개서가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을까. 모범 답안은 아니지만 입학사정관제를 통해 2004년 미국 하버드대에 합격한 재미교포 학생과 2009학년도 서울대 이공계에 합격한 학생의 자기소개서가 힌트는 될 수 있을 것이다. 서울대 합격생의 경우 지면사정상 중간 중간 생략했지만 원문을 그대로 살렸다.

김기용 기자 kky@donga.com》

▶▶ 서울대 이공계 합격생 A 씨

1. 지원동기와 진로계획을 중심으로 우리 대학교가 특기자전형에서 지원자를 선발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띄어쓰기를 포함하여 1000자 이내로 기술하여 주십시오.

사실 어렸을 적 제 꿈은 과학자였고 또 한때는 파일럿이었습니다. 그러나 점점 시력이 감퇴 해 졌고 파일럿이라는 꿈을 접어야 했습니다. 대신에 저는 비행기를 만들겠다는 꿈을 키웠습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저는 사물의 작동원리를 알아내는 것을 좋아 했던 건지 아니면 그냥 호기심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물건을 분해하기를 좋아했습니다. 분해 할 때 고장을 내서 어머니에게 꾸중도 많이 듣곤 하였지만 고장 난 물건을 고치기도 하여 혼자 뿌듯해 하기도 했습니다. 매년 5월은 과학의 달이라고 하여 과학경진대회를 열곤 했습니다. 전 그때 글라이더나 고무동력기를 만들어 날아가는 것을 보며 커서 꼭 진짜 비행기를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던 기억이 납니다.

우리나라의 항공기술이 그렇게 진보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수한 인재들이 모두 생명공학이나 의대, 컴퓨터 공학 등 유망하고 돈을 잘 버는 직업으로 빠져나가면서 항공분야와 같은 공대를 기피하는 경향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책 ‘마시멜로이야기’에서 그랬듯이 성공하기 위해 남다른 길을 걸어가 보고 싶습니다. 고등학생이 된 후에도 꿈을 이루기 위해 찾아본 결과 서울대학교 기계공학부가 가장 이상적이라고 판단하였습니다.

만약 제가 기계항공공학부에 진학하게 된다면 1,2학년 때에는 역학과 컴퓨터 관련 분야에 매진하여 3,4학년 때에 항공 우주공학을 전공함에 부족함이 없도록 할 것이며 졸업 후에는 대학원에서 항공관련 분야를 좀더 공부하여 경쟁력을 갖춘 후 기업체나 연구소에 들어갈 계획입니다. 그곳에서 제가 직접 디자인과 설계를 하여 작게나마 저만의 비행기를 만들고 싶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기술 개발에 힘써 우리나라 항공이 다른 나라와 비교하여 뒤떨어지지 않도록 하고 싶습니다. 저는 준비되어 있습니다. 마음껏 꿈을 펼칠 수 있도록 기회를 얻고 싶습니다.

2. 지원한 모집단위에서 공부하기 위하여 고등학교 재학기간 동안 어떤 노력들을 기울여 왔는지에 대해 학업능력, 특기능력, 모집단위 관련 활동(자유전공학부 지원자의 경우 다양한 학문적 관심) 등을 중심으로 구체적으로 기술하여 주십시오(띄어쓰기를 포함하여 1000자 이내).

(고등학교 재학경험이 없거나, 졸업한지 오래된 경우에는 최근 3년간의 활동을 중심으로 기술하면 됩니다.)

고등학교에서 처음 시험을 봤을 때의 성적은 약 200명중에서 49등이었습니다. 나름 중학교에선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고등학교에선 별 볼일 없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 제가 서울대에 지원할 기회나 얻을 수 있을까 걱정도 했습니다. 시골 토박이인 저는 다른 아이들처럼 선수학습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아갈 구멍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서울대학교 기계항공학부에서 수학하기 위해서는 수학과 물리에 탁월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수업시간에 다른 이들보다 더욱 집중해서 들었고 무엇보다 수학에 많은 투자를 했습니다. 그러나 학기가 진행되면서 조금씩 차이가 좁혀지는 듯 했습니다. 그 후로도 꾸준히 수학을 하였고 2학년이 되면서 과학영역이 세분화 되자 물리 영역에 친구들보다 우수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물리와 수학에 중점을 두고 공부해 2학년 때에는 교내 과학경시대회 물리 부문에 나가 은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3학년 여름 방학에 수학동아리에 참가하여 활동을 했고 꾸준히 수학공부를 하여 전국수학경시대회(KMC)에 입상했고 교내수학경시대회 우수상, 전라남도 수학경시대회 은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러나 가장 어려움을 느낀 과목은 영어였습니다. 영어는 대학과정 수학에 필수이고 국제세계 무대로 나아가는데 있어 꼭 해야 하는데 1학년 때 독해능력은 썩 좋지 못했고 듣기 능력은 평균 이하였습니다. 1학년 때 방도를 찾지 못하고 겨울 방학에 처음으로 과외를 해보기로 결심했습니다. 2달가량 열심히 배웠고 영어 공부하는 법을 익혀 꾸준히 양을 늘리어 가며 노력하여 하루에 30지문씩 하기도 했습니다. 그리하여 영어도 일정수준에 도달하여 만족스러운 성적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겨울 방학 때 항공공학에 필요한 기초 지식을 함양하기 위해서 양력의 원리와 비행 시 공기의 저항을 줄이는 방법, 그리고 비행기의 구조 등 여러 가지를 찾아 검색하여 보았습니다. 그 후로도 공부할 때 관련 지문이 나오면 따로 스크랩해 놓아서 토의 학습 시 자료로 활용하기도 하였습니다.

3. 가정환경(성장과정, 생활여건 등), 학교 및 지역환경, 고등학교 시절에 겪은 어려움 등 자기소개에 도움이 될만한 사항이 있는 경우,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기술하여 주십시오(띄어쓰기를 포함하여 1000자 이내).

(소년·소녀 가정의 경우, 반드시 지방자치단체에서 발행한 소년·소녀 가정 확인서를 제출하여야 합니다.)

초등학교 때 우리 학교는 한 학년이 50명 정도 되었습니다. 시가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가끔은 학교수업이 끝나면 냇가나 산에서 놀곤 했습니다. 농사철이 되면 포도밭에서 흙을 파서 거름도 주고 포도 줄기가 안 휘도록 묶어주기도 하고 포도가 새순이 나면 따주기도 했습니다. 포도가 익을 때면 새들이 포도를 못 쪼아 먹도록 새망도 쳤습니다. 포도와 백숙, 닭도리탕을 팔았기 때문에 수확한 포도를 나르기도 하고 반찬들도 나르며 사람들이 먹고 간 후 남은 상도 치우는 일 따위를 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어느 날 ○○○○○○에 다니시는 아버지가 돌아오시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입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아버지께서는 뇌가 다치셨고 그 이후로 간에서 암이 발견되어 서울로 올라가 병원 생활을 계속하셔야 했습니다. 그동안 저와 누나는 고등학생이 되었고 어머니께서는 여름에 포도밭 일을 하시고 다른 때는 농공단지에서 미싱일을 하시며 겨우겨우 버티어 갔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1학년 11월쯤 저희 가족은 저축금과 빚을 얻어 작은 슈퍼마켓을 장만했습니다. 아버지는 사회생활에 어려움이 많아서 거의 어머니 혼자서 가게일을 해야 했습니다. 요즘은 경기가 안 좋아서 아침 7시부터 새벽 3시 까지 가게를 보고 계십니다. 이런 가정환경 때문인지 저는 새로운 사회로 나갈 때마다 자신감이 없어지고 남에게 저 자신을 알리는 게 부끄럽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어려움이 제게는 성장을 하는데 있어 촉진제가 되었고, 도전이 됐습니다. 탈무드에 보면 ‘가난은 수치가 아니다. 그러나 명예라고 생각해서도 안된다.’ 라는 문구가 나옵니다. 저는 가난은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그 기회를 통해서 지금까지 성장할 수 있었고 앞으로 어떠한 일이든지 이겨내리라 굳게 다짐해 봅니다.

4. 교내·외 활동 중 대표적인 활동을 5개 이내로 기술하고, 이런 활동이 지원자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 기술하여 주십시오(띄어쓰기를 포함하여 각 활동별로 250자 이내).

(봉사활동을 포함하여 지원자의 임원활동, 동아리 활동, 연구활동 등을 기재하고, 학교생활기록부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내용은 반드시 증빙서류를 첨부해야 합니다. 단, 연구활동, 작품출판 등은 학교생활기록부에 내용이 기재된 경우에도 해당 원본을 제출하십시오.)

△봉사활동 실버타운

한번은 정말 봉사활동 같은 봉사활동을 하기 위해서 한천에 있는 실버타운을 갔습니다. 하루는 어르신들께서 사시는 방안의 화장실을 청소하였습니다. 한곳씩 맡아 청소를 하던 중 어떤 할아버지가 쓰시던 세면대가 막혀 물이 흘러가지 않았습니다. 제가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없을까 하여 세면대 배관을 빼서 청소한 후 끼워보니 물이 내려갔습니다. 그때 저는 진정한 봉사활동이란 그냥 청소가 아니라 힘든 점을 찾아내어 개선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학급 부실장

올해 처음으로 부실장이라는 직책을 맡아 보았습니다. 부실장이라는 직책이 생각보다 일도 많았고 쉽지만은 않았지만 그전까진 항상 학급 일에 소극적이었던 나의 생각을 바꿀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습니다. 실장과 함께 학급을 대표하면서 책임감과 리더십도 기를 수 있었습니다. 또한 많은 친구들과 한층 더 가까워 질수 있어 대인관계 형성에도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수학동아리

방학동안 잠시 참가했었습니다. 어려운 문제들만 풀어봄으로써 창의력을 키울 수 있었고 발표과정을 통해서 나의 생각을 표현하는 능력을 기를 수 있었습니다. 다른 친구들과 접근법을 공유해서 다양한 각도의 접근법을 익힐 수 있었습니다. 심층 면접에 대비할 수도 있어서 좋은 기회였다고 생각합니다. 주로 혼자만 수학공부를 했는데 다른 친구들과 함께 할 수 있었던 뜻 깊은 활동이었습니다.

△헌혈

학교로 녹십자사에서 헌혈 받으러 온다기에 지원해서 헌혈하기로 했습니다. 사실 전 건강 체크도 할 겸, 몸에 좋다기에 한 것 이었습니다. 그런데 병원에서는 피가 많이 부족하다면서 특히 제 혈액형인 O형이 많이 부족하다는 녹십자사 선생님의 설명을 들어보니 나의 작은 선행이 다른 사람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기회가 닿으면 자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독서논술 동아리

○○○은 작년에 작문선생님이 만들었던 독서논술 동아리 입니다. 주로 신문 독서나 필독도서를 중심으로 토의토론 수업을 했습니다. 이 활동을 통해 특정 상황에 대해 저의 입장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면서 다른 사람의 내용도 수용하고 나의 잘못된 생각도 고칠 수 있었습니다. 친구들과 자유롭게 토의하면서 생각의 다양성을 엿 보았고, 이렇게 토의된 내용을 중심으로 논술문을 작성했습니다. 쉬운 독서논술을 할 수 있어 큰 의미가 있었습니다.

5. 자신이 읽었던 책들 가운데 가장 인상 깊었던 책 3권을 선택하고, 그 책을 선택한 이유를 기술하여 주십시오(띄어쓰기를 포함하여 각 도서별로 500자 이내).

△꿈꾸는 다락방

이 책은 저의 가치관과 삶에 큰 변화를 준책입니다. 저는 논리적이고 이성적이며 객관적으로 분명한 걸 좋아하기 때문에 이 책의 핵심 문구인 ‘생생하게 꿈꾸면 이루어진다.’는 제게 허무맹랑한 소리로만 들렸습니다. 그러나 이 책에 나오는 여러 사례, 그중 특히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의 스토리는 저의 가치관을 마구 흔들었습니다. 그는 그저 폼만 잡고 놀고 있는 게 아니라 꿈꾸며 노력하고 있던 것 이었습니다. 저는 아무리 불가능해 보이는 일일지라도 인간이기에 가능으로 바꿀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나의 삶에도 불가능이란 없을 것이며 모든 일엔 불가능해 보이기만 한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파인만의 여섯 가지 물리 이야기

리처드 파인만이 대학부생에게 직접 강의한 내용을 엮었기 때문에 대학생이 된 기분으로 읽었던 책입니다. 이 책을 읽기 전 저는 물리에 대해선 많이 알고 있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알아 왔던 부분은 물리학의 기초인 고전역학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 책을 읽으며 기초 물리학 및 양자 역학 등 많은 부분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습니다. 넓고 깊은 물리의 영역은 저의 흥미를 자극하였습니다. 대학생이 되어 이 같은 내용을 배울 수 있다는 사실에 흥분되기도 했습니다. 작은 분자와 원자 세계 그리고 중력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습니다.

△하늘에 꿈을 띄우다

일제치하시대에서도 하늘에 꿈을 걸며 청춘을 바치신 최원문 씨를 보며 무한한 감동과 존경을 받았습니다. 드디어 저의 역할모델을 찾은 듯싶었습니다. 그분의 삶을 보며 저도 그처럼 가슴속에 품어온 꿈을 잃지 않고 이뤄 내리라고 다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를 보며 진정한 애국자란 무엇인가 느꼈고 저도 그런 위인이 되리라고 다짐했습니다. 또한 6․25이후 우리나라 항공기술의 발전을 생생히 관조 할 수 있었고, 주로 미국의 기술에 의존한 우리나라 항공을 보며 약간 실망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앞으로 나아갈 길이 넓다고 생각했고 기술적 자립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경쟁력 있는 항공기술을 갖춘 대한민국 그것이 저의 꿈이고 대한민국의 미래라고 생각합니다.

■ 서울대 입학사정관 전형 자기소개서 양식

1. 지원동기와 진로계획을 중심으로 우리 대학교가 특기자 전형에서 지원자를 선발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띄어쓰기를 포함하여 1000자 이내로 기술하여 주십시오.

2. 지원한 모집단위에서 공부하기 위하여 고등학교 재학 기간 동안 어떤 노력들을 기울여 왔는지에 대해 학업능력, 특기능력, 모집단위 관련 활동(자유전공학부 지원자의 경우 다양한 학문적 관심) 등을 중심으로 구체적으로 기술하여 주십시오.(띄어쓰기를 포함하여 1000자 이내)

3. 가정환경(성장과정, 생활여건 등), 학교 및 지역환경, 고등학교 시절에 겪은 어려움 등 자기소개에 도움이 될 만한 사항이 있는 경우,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기술하여 주십시오.(띄어쓰기를 포함하여 1000자 이내)

4. 교내·외 활동 중 대표적인 활동을 5개 이내로 기술하고, 이런 활동이 지원자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 기술하여 주십시오.(띄어쓰기를 포함하여 활동별로 250자 이내)

5. 자신이 읽은 책들 가운데 가장 인상 깊었던 책 3권을 선택하고, 그 책을 선택한 이유를 기술하여 주십시오.(띄어쓰기를 포함하여 도서별로 500자 이내)

▶▶ 하버드대 합격생 B 씨

내가 고향이라고 믿는 곳이 내 고향이다: 내 문화적 정체성

(Home is where I make it: My Cultural Identity)

놓친 물고기가 더 커 보인다. 그 물고기를 아예 포기해 버린 때는 더 그렇게 느껴진다. 저 멀리 빛나는 별은 모든 이의 소망을 담고 있다. 별이 내 가슴에 떨어진 것은 열 다섯 살 때였다.

우리 부모님은 이민 1세대로 나는 백인 마을에서 컸다. 그래서 아주 어릴 때부터 나는 내가 또래 녀석들과 다르다는 걸 알았다. 사람들은 곧잘 물었다. “웨어 아유 프롬?”

내 대답은 늘 똑같았다. “루지애나, 내 고향은 루지애나에요.”

물론 그건 사람들이 예상한 답변이 아니었다.

“그 얘기를 하는 게 아냐. 중국이나 일본 어디서 왔느냐는 말이지."

그 두 나라 사이에 낀 반도국을 사람들은 들어본 적도 없는 것 같았다.

일곱 살 때 나는 처음 한국에 가봤다. 가방은 무거웠고 한국어도 서툴렀지만 이방인이라는 느낌은 없었다. 순진하게도 나는 여기가 내 고향이라고 믿었다.

어디를 가도 검은 머리였다. 쌍꺼풀이 없어도 아무렇지 않은 느낌.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아시아인"은 없었다. 사람들은 내게 “눈이 크다”거나 “작고 말랐다”고 말했다.

겨우 두 달 동안이었지만 한국에서 내가 받은 느낌은 몇 년 동안 내가 누구인지를 느끼고 기억하게 해줬다.

내가 다시 한국에 간 것은 고등학교 2학년을 앞둔 여름이었다.

나는 금세 사람들이 예전만큼 내게 관대하지 않다는 걸 느꼈다. 부모님은 화가 나서 내게 전화를 거셨다. 내가 버릇없게 굴었기 때문이다.

너무 솔직한 질문과 서양식 사고방식이 친척들을 불편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나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나는 삼촌께 나한테 화가 나셨느냐고 물었다.

삼촌은 “아니다. 너한테 화가 난 건 아니야. 단지 널 대하는 게 어렵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분명 한국 사람처럼 보이는데 한국말로 미국 애들 생각을 말하는 건 이상한 일이니까. 넌 한국 사람이 아니란다. 우리말을 할 줄 아는 미국인이지”하고 답하셨다.

충격이었다. 미국에 있을 때처럼 한국에서도 나는 이방인이었다. 도망갔던 물고기가 다시 돌아왔다. 내가 기도했던 별이 떨어졌다. 나는 서둘러 쫓아가 별똥을 주웠다.

이제 나는 내 고향이, 내 정체성이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완전한 한국 사람도 완전한 미국 사람도 아니다. 절반은 한국인이고 또 절반은 미국인이다. 내 고향이 한국 아니면 미국이라고 구분 짓는 것도 불필요하다. 내가 고향이라고 믿는 곳, 그곳이 내 고향이다.

아장아장 걸을 때부터 나는 그림 그리고 색칠하는 걸 퍽 좋아했다. 그 때문에 우리 부모님은 나를 “단순한 아이”로 생각하신 것 같다.

부모님이 이민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내가 태어났기 때문에 유아 교육을 받을 만한 여유가 없었다. 나는 자유롭게 그림을 그렸다.

하지만 곧 우리 부모님이 꿈을 이뤘다. 중산층 마을로 이사한 것이다. 나도 유치원에 들어갔다.

그때 로빈슨 선생님은 우리 부모님께 내가 예술에 재능이 있다고 말씀해주셨다. 그녀는 내가 미술 영재 테스트를 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하기도 했다.

내 진로와 적성을 두고 공부와 그림, 두 갈래 갈림길이 생긴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 나는 양 쪽 모두에 집중했다.

학교에선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었다. 특히 수학 성적이 좋았다. 방과 후에는 스튜디오에서 그림을 그렸다.

예술적 재능이 뛰어나다는 칭찬을 많이 들었고 상도 많이 탔다. (어릴 땐 그림에 소질을 보이는 학생이 많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건 중요한 일이다.) 나는 내 열정과 소명을 찾은 듯한 기분이었다.

그때 우리 부모님이 어떤 생각을 하시는지 알 수 없었다. 내가 받아온 상장과 트로피를 보고 마냥 웃으실 뿐이었다. 내가 예술가가 되고 싶다고 할 때도 아무 말도 없으셨다.

중학교에 들어가자 사정이 달라졌다. 공부에 집중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림은 취미면 충분하다는 말씀이었다. 나는 집에서는 계속 그림을 그렸지만 스튜디오에 다니지는 않았다. 이제 나는 미술 대신 수학 대회에서 상을 타기 시작했다.

중학교 3학년 어느 4월의 목요일 오후 나는 고등학교 수강 신청서를 쓰고 있었다.

어차피 들어야 하는 영어, 수학, 과학, 사회, 외국어, 연구조사 같은 과목부터 신청했다. 그리고 한 칸이 남았다. 나는 오랫동안 쉬었던 미술을 듣기로 했다. 갑자기 한동안 잊고 있던 미술에 대한 열정과 애정이 샘솟아 나는 것 같았다.

나는 다시 미술에 푹 빠졌지만 그림 때문에 공부를 소홀히 한다면 부모님을 실망시키는 일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부모님은 또 미술을 그만두라고 말씀하실지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미술은 내게 가장 뜻 깊은 일이다. 사실 나는 미술에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하지고 않았고 내게 가장 인상 깊은 것도 미술은 아니다.

하지만 부모님의 반대에도 내가 세상을 향해 표현하는 가장 중요한 방식은 그림이었다. 미술은 내 첫 번째 자신감이고, 열정이었다. 미술을 통해 나는 한 인격체로서 성장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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