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끼 위폐’ 7000만원 시중에 풀릴수도

  • 입력 2009년 2월 14일 02시 58분


30대 여성 피랍 19시간 ‘아찔 인질극’… 경찰, 범인 추격하다 놓쳐

범인들, 가짜 돈 눈치 못채고 인질 풀어줘

어설픈 작전… 위폐 들켰더라면 큰일 날뻔

10일 오후 11시 40분경. 서울 강서구 내발산동에서 빵집을 운영하는 박모 씨(39·여)는 가게 주방을 청소하고 있었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오후 11시가 넘어서자 손님이 뜸해졌다. 갑자기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괴한 2명이 들이닥쳤다. 범인들은 박 씨를 때린 뒤 눈과 입에 테이프를 붙이고 카운터에서 현금 80만 원을 턴 후 박 씨를 납치했다. 이때부터 악몽 같았던 19시간의 납치극이 시작됐다.

11일 오전 1시 55분경 남편 유모 씨(39)는 부인의 휴대전화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부인을 우리가 납치했으니 현금 7000만 원을 준비해라. 경찰에 신고하면 부인은 죽게 될 것이다. 내일 다시 전화하겠다.”

유 씨는 곧바로 경찰에 신고했다. 유 씨 주소지와 사건 발생지 관할 경찰서 소속 형사들이 긴급 소집됐다.



범인들은 박 씨를 납치한 뒤 승용차 안에서 남편의 직업과 차종을 물었다. 박 씨는 남편의 차가 ‘마티즈’라고 대답했다. 처음에 “돈이 2억 원 정도 있느냐”고 물었던 범인들은 마티즈라는 대답에 요구 액수를 7000만 원으로 낮췄다. 범인 두 명은 서로 ‘형님’ ‘아우님’이라고 호칭했다. 한 명은 ‘식겁했다’, ‘∼잉’ 같은 사투리를 썼고, 다른 한 명은 서울 말씨였다.

범인들이 다시 전화를 걸어온 시간은 11일 오전 8시. 현금 7000만 원을 다시 요구했다. 오전 10시와 낮 12시에 잇달아 전화를 걸어와 “돈이 준비됐느냐”고 물었다. 유 씨는 경찰의 권유대로 “3500만 원밖에 준비가 안 돼 은행 융자를 받아야 한다”고 둘러대며 시간을 끌었다. 성산대교 인근에서 범인들과 만나기로 약속한 유 씨는 경찰과 함께 곧바로 가짜 지폐 7000만 원을 들고 접선 장소로 출발했다.

1만 원짜리 가짜 돈 7000장이 담긴 가방에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을 부착해 범인을 유인한다는 게 경찰의 작전이었다. 가짜 돈은 일련번호가 ‘EC1195348A’로 모두 같고 홀로그램과 문양 등을 빛에 비춰보면 검게 나온다. 눈썰미가 있는 사람이라면 쉽게 진짜 지폐와 구별해낼 수 있을 정도라는 게 경찰의 설명이다.

유 씨가 정해진 장소에 가방을 놔두자 몇 분 뒤, 번호판이 없는 배기량 250cc짜리 오토바이가 나타났다. 헬멧과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오토바이 운전자는 가방을 집어 들자 쏜살같이 내달렸다.

접선 현장 주변에 있던 경찰관 48명이 오토바이, 택시, 자가용 등에 나눠 타고 돈 가방을 든 오토바이를 쫓기 시작했다. 하지만 추격전은 오래가지 못했다. 추격전이 시작된 지 25분 만에 양천구 목동의 한 언덕배기에서 오토바이는 경찰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오토바이는 중앙선을 넘어 차선 반대편 골목으로 들어가 경찰의 추격을 따돌렸다.

경찰 관계자는 “다른 범인이 피해자를 데리고 있는 상황에서 생명이 위험해질 수 있어 적극적으로 검거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같은 시간 다른 경찰관들은 가방에 부착된 GPS의 신호를 추적해 범인의 위치를 쫓았지만 결국 놓치고 말았다.

경찰의 추적을 따돌린 범인들은 오후 3시 2분 전화를 걸어 “6시에 전화할 테니 경찰에 신고하지 말라”고 했다. 범인이 가져간 가방은 오후 4시 반경 구로구 신도림동에 위치한 공구상가 근처에서 발견됐다. 박 씨의 생사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가짜 돈인지 눈치 채지 못한 범인들은 오후 6시 25분경 전화를 걸어와 “박 씨를 풀어주겠다”고 했다. 30분 뒤 남편 유 씨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나 풀려났어”라는 박 씨의 말과 함께 인질극은 19시간 만에 끝났다.

다행히 인질의 목숨은 건졌지만 경찰이 어설픈 작전을 폈다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오토바이를 탄 용의자가 경찰의 추격 사실이나 자신이 받은 돈이 위폐였다는 사실을 알아채는 등 당초 작전과 다른 상황이 발생할 경우에 대한 대비가 허술해 다른 용의자가 붙잡고 있던 인질의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경찰은 13일 범인들이 이동한 경로 주변의 폐쇄회로(CC)TV 녹화테이프와 범인 검거를 위해 사용했던 가짜 지폐의 피해자가 있는지를 확인하는 등 범인을 쫓고 있다.

황형준 기자 constant2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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