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근씨 처조카 간첩누명 벗었다

  • 입력 2008년 12월 19일 22시 40분


"고문과 폭행을 당하던 그 때가 떠오를 때면 으스러졌던 팔에 통증이 느껴지는 듯 합니다."

이중간첩으로 몰려 사형이 집행된 이수근 씨의 간첩 행위를 도운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 받은 이 씨의 처조카 배경옥(70) 씨는 40여년 만인 19일 재심에서 무죄 선고를 받은 뒤 당시의 고통스런 순간을 이렇게 회상했다.

41년 전인 1967년 3월 북한 조선중앙통신사 부사장이었던 이 씨는 판문점을 통해 귀순했다. 남한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한 이 씨는 1969년 1월 위조 여권으로 캄보디아로 향하다 비행기 안에서 중앙정보부 요원에 체포됐다.

배 씨는 이 씨의 여권을 위조해 주는 등 그의 출국을 도왔다는 이유로 함께 붙잡혔다.

중앙정보부는 이들에게 잔인한 고문과 폭행을 퍼부어 간첩 혐의를 자백 받았다. 얼마 뒤 이 씨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고, 배 씨는 무기징역 형을 받아 21년 간 복역한 뒤 1989년 출소했다. 그러나 이듬해 배 씨의 아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등 불행한 가족사는 계속됐다.

배 씨의 재심사건을 맡은 서울고법 형사6부(부장판사 박형남)는 19일 "사형이 집행된 이 씨에 대해 간첩으로 인정할 증거가 없어 배 씨가 간첩행위를 방조했다는 점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장인 박 부장판사는 배 씨에게 정부를 대신해 "이제 법정 밖으로 나가고 세상 속으로 나가도 좋다"며 사과의 뜻을 전했다.

배 씨는 선고 직후 "당사자뿐만 아니라 가정과 주위의 모든 것이 파괴되는 공권력 남용이 다시는 없어야 한다"며 "형사 보상 청구가 가능한 지 변호인과 상의해 보겠다"고 말했다.

한편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1부(부장판사 이광만)도 이날 간첩 혐의로 붙잡혀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했던 고(故) 이장형(2006년 사망) 씨에 대한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이 씨는 1972년 2월 일본 도쿄에서 조총련 간부로 활동하던 숙부를 만난 뒤 간부로 포섭돼 '제주도 일원 해안경비상황을 탐지하라'는 지령을 받아 실행에 옮긴 혐의로 붙잡혔다. 이후 고문 기술자로 유명한 이근안 씨로부터 온갖 고문에 시달리다 간첩 혐의를 자백했고 1984년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

재판부는 "이 씨가 치안본부 대공수사단에 57일간이나 불법 구금돼 있으면서 온갖 고문과 협박 속에서 진술 조서를 작성해 증거 능력이 없다"며 "다른 증거를 보더라도 반국가단체의 지령을 받고 국가기밀을 수집했거나 잠입 탈출했다고 볼 수 없다"고 밝혔다.

이종식기자 bel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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