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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8년 11월 24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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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 경중따라 치료 표준화… 과잉진료 차단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사는 헤링겐(65) 씨는 당뇨병 치료 중 심장 이상이 발견됐다. 의사는 심장에 관을 삽입하는 카테터 검사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한국에서라면 진단 차트에 검사 처방을 추가한 후 바로 진료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헤링겐 씨는 당뇨병 치료를 먼저 끝낸 후 환자 등록을 다시 하고 심장검사를 받았다.
이런 제도를 ‘포괄수가제도’라고 부른다. 질병의 경중에 따라 등급을 매겨 해당 치료법의 범위 내에서 진료를 하는 제도다. 독일에서는 2002년부터 입원이 필요한 대부분의 질병에 대해 질병 등급을 정해 놓고 진료하는 포괄수가제도를 따르고 있다.
환자가 더 입원하고 싶다고 요청해도 정해진 치료를 받으면 퇴원해야 한다. 한국인들은 불편을 호소하겠지만 독일인들은 그렇지 않다.
헤링겐 씨는 “늘 그래 왔기 때문에 불편한 점이 없다”며 “병원에 오래 있는다고 좋아지는 것도 아닌 만큼 의사를 믿고 진료를 받으면 된다”고 말했다.
▽등급따라 입원 일수 정해져=포괄수가제도에서 맹장염 수술 치료법은 6등급으로 나뉜다. 등급에 따라 입원기간도 최소 3일에서 최대 12일로 정해져 있다.
포괄수가제도 시행 후 독일에서 환자의 평균 입원기간은 크게 줄었다. 이 제도를 도입하기 전인 1996년 연간 환자 1인당 평균 입원일수는 10.8일이었지만 2006년 8.4일로 2.4일이 줄었다.
다만 전체 진료비 지출은 크게 줄지 않았다. 한국의 국민건강보험공단과 비슷한 독일지역질병금고(AOK)의 유겐 메르츠 헤센 주(州) 대변인은 “노인 환자와 만성질환자가 늘면서 진료비 지출은 증가하는 추세”라며 “그러나 포괄수가제도를 통해 과잉진료를 통제하지 않았다면 증가 폭은 훨씬 컸을 것”이라고 말했다.
▽개인 의료비 지출도 줄어=포괄수가제도는 등급별로 치료법을 정해 놓고 있어 전국 어느 병원을 가든 동일한 진료를 받게 된다. 독일은 내년부터 전국 모든 병원에서 이 같은 ‘표준화 진료’를 실시한다.
개인의 의료비 지출을 줄일 수 있는 것도 포괄수가제도의 장점으로 꼽힌다.
우리나라 대학병원에서 맹장수술을 받고 3일, 6일 입원할 경우 진료비는 각각 110만 원, 140만 원 선이다. 그러나 포괄수가제도를 적용할 경우 진료비는 각각 85만 원, 110만 원 선으로 낮아진다.
▽의사들 진료비 삭감 안 되게 서류에 매달려=그러나 포괄수가제도는 병원의 행정업무가 늘고 의사가 환자에게 소홀해지는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
독일에서 환자가 10일간 입원할 경우 포괄수가제도 도입 전에는 의사들이 10일간 환자에게 실시한 모든 진료 항목을 모아 진료비를 AOK에 청구하면 됐다.
그러나 도입 후에는 환자가 질병의 어느 등급에 속하는지 정확하게 진단해 그에 맞는 진료비만 청구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진단명이 정확하지 않으면 진료비를 청구해도 받을 수 없다. 이 때문에 의사들은 환자 진료보다는 청구한 진료비가 삭감되지 않도록 서류를 작성하는 데 몰두할 수 있다.
프랑크푸르트의 미국계 아스클레피오스병원의 심장 전문의 마커스 미탕 박사는 “포괄수가제도의 취지는 좋지만 정작 중요한 환자 진료는 뒷전으로 밀릴 위험이 있다”고 말했다. 외래진료 환자가 증가할 수 있다는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입원 기한이 지나면 퇴원해야 하기 때문에 환자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외래로 병원을 찾아야 한다.
미탕 박사는 “포괄수가제도로 인한 행정업무를 줄이는 보완책이 마련된다면 과잉진료에 따른 의료비 지출을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
푸랑크푸르트=김상훈 기자 corekim@donga.com
■포괄수가제 제한실시 한국은
“환자상태 다른데 규격화되나”
의료계 반발 7개 질환만 시행
현재 우리나라는 의사가 진찰, 수술, 처치 등 진료 행위를 할 때마다 돈을 내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의사 입장에선 진료를 많이 할수록 수입이 늘어난다.
이 제도는 의사가 환자의 질병을 종합적으로 돌볼 수는 있지만 과잉 진료의 소지가 있다.
국내에서 과잉 진료를 막기 위한 포괄수가제도 도입 논의는 1994년 시작됐다. 1997∼2001년 일부 병원에서 시범사업을 실시했고 2002년부터 4개 진료 과, 7개 질병에 한해 희망 병원은 포괄수가제를 제한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포괄수가제도 대상이 되는 질병은 안과 수정체수술, 편도절제술, 항문수술, 탈장수술, 맹장수술, 자궁수술, 제왕절개 분만이다.
이들 질병은 경중에 따라 등급이 정해진다. 수정체수술의 경우 한쪽 눈이냐 양쪽 눈이냐, 4mm 이하로 절개하느냐 그 이상 절개하느냐 등에 따라 12개 등급으로 나뉜다. 자궁수술은 복강경 수술법을 이용하느냐, 자궁을 적출하느냐 등에 따라 12개 등급으로 분류된다.
포괄수가제도가 시행된 지 6년이 지났지만 도입 병원은 늘지 않고 있다. 병원계와 의료계가 반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양근 대한병원협회 부대변인은 “환자의 상태가 모두 다른데 이를 규격화하면 의료 서비스의 질이 떨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김주경 대한의사협회 대변인도 “의료행위를 일반 상품처럼 가격을 정해 통제하면 의사의 진료권이 심각하게 훼손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포괄수가제도는 의료비 절감을 위해 꼭 필요하다는 지적도 많다.
이창준 보건복지가족부 보험급여과장은 “제도의 부작용을 보완해 가며 단계적으로 확대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김상훈 기자 corekim@donga.com
△ 2회에는 ‘주치의 제도 도입 프랑스 편’이 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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