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理知논술]2008 대입논술 해설

  • 입력 2008년 3월 3일 03시 03분


▼2008학년도 성균관대 인문계 정시논술 해설▼

(문제는 스카이에듀 홈페이지에서 내려받을 수 있습니다)

인문학적 제시문 관례 깨고 사회현상 논제

2008학년도 성균관대 인문계 정시논술 논제는 남녀 간 임금 격차에 관한 것입니다. 남녀 간에 임금 격차가 발생하는 것은 성차별 때문이라는 시각과, 학력이나 경력 등 능력 차이에서 비롯되는 현상이라고 보는 시각 사이의 대립을 다루는 문제입니다. 조금은 식상하다고 할 만큼 낯익은 주제이지요. 제시문은 총 6개가 나왔는데 주로 남녀의 고용형태, 교육 및 임금 실태 등 객관적인 정보를 담고 있습니다. 특정 주제에 관한 학자들의 다양한 주장과 이론을 제시하고 인문학이나 사회학적 성찰을 요구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예전의 성균관대 논술에는 학술적·인문학적 제시문이 종종 등장했는데, 이번 논제는 좀 더 현실에 가까워 보입니다.

■ 문제1

네 개의 제시문을 상반된 두 입장으로 분류하고 각 입장을 요약하는 문제입니다. 두 개씩 짝을 지어 요약하는 기존의 성균관대식 요약 문제가 그대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먼저 각 제시문을 살펴보겠습니다.

제시문 1은 영국에서 지난 30년간 남녀 간의 임금 격차가 많이 해소됐다는 사실을 제시하고 영국 사회는 어느 정도 남녀평등이 실현되어가고 있지만 여전히 남녀 간에 임금 격차가 있으므로 아직 성적 불평등이 나타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제시문 1에 따르면 임금 격차의 원인은 사회구조에 따라 남녀가 서로 다른 직업을 갖고 있다는 데 있으며, 여성들에게는 고임금의 직종에 진출하는 것을 막는 여러 가지 사회적 장벽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결국 성별 임금 격차의 원인은 남녀 차별이라는 것입니다.

제시문 2는 남녀 간 임금 격차의 요인을 세 가지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고용 분포의 차이에 의한 고용 차별 △임금 계수의 차이에 의한 임금 차별 △생산적 요소를 포함한 기타 요인이 그것입니다. 앞의 두 원인이 남녀 간 임금 격차의 원일을 남녀 차별로 본다면 마지막 원인은 합리적인 근거에 토대를 둔 것입니다. 제시문 2는 남녀 임금 격차의 대부분은 마지막 부분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결국 임금 격차는 성 차별과 무관하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임금 계수의 차이에 의한 임금 차별’에서 ‘임금 계수’라는 단어가 다소 생소합니다.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수학에서 계수라는 말은 함수식에서 변수 앞에 붙는 상수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근로시간, 부양가족, 학력 등 임금을 산정하는 다양한 변수와 이로 구성된 함수식이 있는데 똑같은 변수에 대해서 남녀가 다른 계수를 쓰는 경우가 있구나’라고 추론해 볼 수 있겠습니다. 똑같은 값에 대해서 남녀를 다르게 평가한다는 것이니까 결국 남녀 차별이 되는 것이지요.

이처럼 처음 보는 낯선 개념이 나오면 자신이 가진 지식을 총동원해서 그 개념이 의미하는 바를 정확히 추론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정확하게 추론하기가 어렵더라도 당황해서는 안 됩니다. 대개는 그 개념이 주제와 관련하여 무엇을 시사하는지 확인하는 정도로만 그쳐도 무방하기 때문입니다. 이 논제도 ‘임금 계수’가 무엇인지 정확히 모르는 학생이라 해도 ‘임금 격차에서 남녀 차별과 관련되는 개념이다’ 정도로만 알면 답안을 쓸 수 있다는 것이지요.

제시문 3은 남녀 간 임금 격차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단지 여성이 남성에 비해서 지적인 능력이 떨어지지 않는데도 가부장적 인습과 전통 때문에 경제활동에서 남성과 공정하게 경쟁할 수 없다는 점을 비판합니다.

제시문 4는 학교 교육을 더 받은 학생들이 나중에 더 많은 임금을 받는다는 실증적 연구결과를 토대로 성별 간의 임금 격차도 주로 학력 차이로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글의 말미에는 직장경력 등 인적 자본을 얼마나 축적했는가 하는 차이도 덧붙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상으로 볼 때 네 제시문을 두 가지 입장으로 나누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제시문 1과 3은 남녀 간 임금 격차를 성 차별 현상으로 보고 있으며, 제시문 2와 4는 이를 성 차별이 아니라 학력이나 경력 등 생산성의 차이에 기인한 현상으로 보고 있는 것이지요.

■ 문제2

가상의 임금근로자들의 성, 학력, 생산 기여도, 임금 수준을 주고 이것이 문제 1의 두 가지 입장과 어떻게 연관되는지 상세히 분석하라고 요구하는 문제입니다.

표의 자료를 얼핏 보면 임금 격차가 성 차별 현상이 아니라는 주장과 부합합니다. 비록 동일한 학력일 때 남성이 여성보다 임금이 높지만 남녀를 불문하고 학력이 높을수록, 생산 기여도가 높을수록 임금이 높기 때문입니다. 결국 표에 따르면, 남녀 간 임금 격차는 성 차별이 아니며 합리적 근거에 의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남녀 고졸의 생산 기여도와 월평균 임금을 보면, 남녀 간의 임금 계수가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남성 고졸과 여성 고졸의 월평균 임금은 각각 180과 150으로 남성이 30 높습니다. 그런데 이는 남성과 여성 간의 생산 기여도의 차이에 따른 것인 바, 남성의 생산 기여도가 120인 반면 여성은 100밖에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성에 비해 남성의 생산 기여도가 20% 높으므로 임금 역시 남성이 여성보다 20 높은 것은 합리적이겠지요.

자세히 분석해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남녀 대졸자를 봅시다. 남성과 여성의 생산 기여도는 각각 160과 150으로 격차는 10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임금은 250과 200으로 50이나 차이가 납니다. 제시문 2에 나온 것처럼 남녀 간의 임금 계수가 다른 것이지요. 따라서 제시문 1, 3의 입장에서는 여전히 남녀 차별이 존재한다고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이상을 다시 정리하면 주어진 표를 바탕으로 볼 때, 제시문 1, 3의 주장은 한편으로는 타당하고 한편으로는 부당합니다. 제시문 2, 4의 주장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문제에서는 ‘이 표의 사례들이 문제 1의 상반된 입장들과 어떻게 연관되는지 상세히 분석’하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주어진 표는 대졸 남녀의 생산성 대비 월평균 임금의 차이를 근거로 제시문 1, 3의 정당성을 증명할 근거가 되는 한편, 고졸 남녀의 생산성 대비 월평균 임금의 비례를 근거로 제시문 1, 3의 논리적 부당성을 증명할 근거도 된다고 하겠습니다. 동일한 논리를 제시문 2, 4에도 적용할 수 있겠지요. 주어진 표는 고졸 남녀의 생산성 대비 월평균 임금이 비례하고 있음을 나타내기 때문에 제시문 2, 4가 정당함을 보여 주기도 하지만, 대졸 남녀의 생산성 대비 월평균 임금의 격차가 존재하므로 제시문 2, 4의 논리적 부당성도 나타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이 표에 따르면 주장 1, 3이나 주장 2, 4 모두 상대 주장의 부당함을 비판하는 한편, 자기주장의 정당함을 옹호하는 근거가 될 수 있습니다.

■ 문제3

제시문 5와 6을 주고 두 제시문이 공통적으로 보여 주는 사회 현상이 왜 발생하는지 문제 1의 입장을 활용하여 설명하라는 문제입니다. 문제 1의 두 가지 입장에서 각각 설명하라고 하지 않고 단지 활용하여 설명하라고만 되어 있으므로 둘 중 하나의 입장을 택해서 설명하면 되겠습니다.

우선 제시문 5는 우리나라 행정고시 합격자의 통계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전체 합격자의 반에 해당하는 49%가 여성이네요. 1997년에 11%에 지나지 않았는데 불과 10년 만에 거의 50%에 도달하게 되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수석합격자가 4년째 여성이라는 점도 특이하고요. 두 번째 제시문도 비슷한 내용입니다. 여학생의 20%가량이 ‘모든 면에서 남학생을 능가하는 엘리트 소녀로 성장하고 있으며, 이 소녀집단이 커서는 직장에서도 남성을 압도하기 시작했다’는 내용입니다. 두 제시문은 공통적으로 최근 여성이 여러 분야에서 남성을 능가하는 업적을 보여 주고 있다는 사실을 제시합니다.

문제 1에서 논의된 두 개의 입장 중에서 성 차별을 주장했던 사람들은 이 현상에 대해 쉽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사회가 구조적으로 여성을 차별하니까 이 장벽을 뛰어넘기 위해서 여성이 남성보다 더 많은 노력을 할 수밖에 없었고, 이것이 남성을 능가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주장을 펼치는 것입니다. 여성이 남성보다 월등한 능력을 보여야만 남성만큼의 대접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반면 남녀 간의 임금 격차는 차별이 아니라 합리적인 것이라는 입장에서는 이 현상을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이 가능합니다. 여성이 적극적으로 자신의 능력을 계발하는 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에 성 차별이 점차 사라지고 능력 위주의 보상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즉 성 차별의 장벽이 사라지고 능력 위주의 분배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자 여성의 성취 욕구가 봇물 터지듯 해 사회 각 분야에서 여성이 남성을 앞서는 현상이 일어난다는 주장이 가능합니다.

이미라 스카이에듀 언어논술 강사

▼2008학년도 서강대 인문계 정시논술 해설▼

(문제는 스카이에듀 홈페이지에서 내려받을 수 있습니다)

단일주제 벗어나 수시같은 복수주제 논제

2008학년도 서강대 인문계 정시논술 논제는 지난해와 형식면에서 다소 차이가 납니다. 비교적 짧은 논제 하나와 상대적으로 긴 논제 하나가 주어진다는 점에서는 지난해와 유사합니다. 그러나 지난해 정시논술에서는 단일 주제형 논제가 출제된 반면, 이번 정시에서는 각 문제의 주제가 서로 다른 복수 주제형 논제가 출제됐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서강대 수시 논술은 오래전부터 이런 유형으로 출제되어 왔으니 이번에는 정시논술도 수시논술의 문제 유형을 따라간 셈입니다.

그러나 내용면에서는 기존 정시논술 출제경향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서강대는 정시논술에서 수시논술과 달리 존재론, 인식론 등 인문학적 성찰을 요하는 주제를 자주 출제해 왔는데, 문제 2 역시 그러한 주제에 속하는 것입니다. 학생들 입장에서는 상당히 어려웠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 문제1

(가)와 (나)를 활용해 (다)에 나오는 ‘오빠’의 삶과 목표를 ‘빛나’의 관점에서 비판하는 문제입니다. (다)의 빛나는 공부를 열심히 하여 성공한 삶을 살면서 돈을 많이 벌고 싶어합니다. 그에 비해 오빠는 ‘신문의 경제면에 나는 세계’가 아닌, 그 너머의 또 다른 무엇을 추구합니다. 빛나가 원하는 삶은 현실주의(심하게 말하면 세속주의나 속물 근성)적 삶이고, 오빠가 원하는 삶은 이상주의적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문제가 재미있는 것은 빛나의 현실주의적 관점에서 오빠의 이상주의를 비판하라는 데 있습니다. 도덕적으로 보면, 빛나는 속물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오빠는 돈이나 성공처럼 보통 사람들이 물질적 가치를 좇는 인물이 아니라 삶의 의미에 대한 본질적인 성찰에 접근하려는 인물입니다. 그동안 대부분의 논술에서는 오빠의 입장에서 빛나를 비판하라고 해 왔습니다. 이 문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빛나의 입장에서 오빠를 비판하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마도 빛나를 비판할 때 하더라도 정확히 알고 비판해야 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을 것 같습니다. 혹은 오빠의 입장에서 빛나를 비판하라고 하면 많은 학생이 지극히 ‘공자님 말씀’ 같은 ‘지당하신 말씀’만 나열하는데, 이것만 가지고는 학생의 개성과 사고력을 측정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현실적인 판단을 내렸을지도 모릅니다. 최근 2, 3년 사이에 이런 관점으로 주장을 펼치라는 문제가 가끔 출제되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를 미리 접해서 실전에서 당황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이 문제는 ‘활용’의 의미가 흔히 논술에서 말하는 것과 다르다는 점에서도 색다릅니다. 문제의 요구는 (가)와 (나)를 활용해서 논술하라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논술에서 ‘활용’이란 비판의 ‘근거’로 사용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가)는 사람들이 부와 권력, 명성을 좇는 것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관심을 받고 싶어하는 인정욕에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즉, (가)는 성공한 삶을 추구하는 빛나의 심리적 배경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나)에 따르면, ‘사람들은 악하지 않으면 완전히 바보’고, ‘세상에는 이야기를 나눌 가치도 없는 사람들이 들끓’기 때문에 그들의 ‘우렁찬 박수소리’에 귀를 기울일 필요는 없습니다. (다)의 오빠는 대부분이 추구하는 삶을 ‘허망’하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런 점에서 (나)는 오빠의 심리적 배경에 대한 설명입니다.

즉 (가)에 따르면 인간의 욕구 중 가장 큰 것이 다른 사람들의 관심이나 인정을 받는 것이지만, (나)에 따르면 그것은 무가치한 것이므로 두 제시문은 대립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가)는 빛나의 입장에 대한 부연 설명이기 때문에 ‘활용’할 수 있지만, (나)는 오빠의 입장과 관련되는 것이기 때문에 빛나의 입장에서는 이를 비판의 근거로 ‘활용’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어떤 관점에서 (나)를 ‘활용’해야 할까요? 비판의 ‘근거’가 아닌, 비판의 ‘대상’으로 ‘활용’해야 합니다. 이 점에서 이 문제에서의 ‘활용’의 의미는 일반적인 논술 문제의 그것과 다릅니다.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구는 인간의 본성입니다. 최근 생물학계는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구가 침팬지와 같은 영장류에서도 발견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오빠는 혼자만의 삶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추구하는 삶을 허망하다고 생각하고, 사람들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는 삶을 추구합니다. 다시 말해,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전혀 없고,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도 거부합니다. 빛나의 입장에서 볼 때, 오빠는 인정받고 싶어하는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빛나가 보기에 오빠는 자신의 본성에 반하는 행동을 하면서 자신의 진짜 욕구를 숨기는 위선자이거나 (다)에 표현되어 있는 대로,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인물이라고 하겠습니다.

■ 문제2

이 문제는 인식의 방식에 대한 것입니다. 4개의 제시문을 두 개씩 짝지어 각 쌍의 공통된 주장을 서술하고, 두 개의 입장이 어떻게 양립 가능한지를 설명하는 문제입니다. 이는 인식론에 해당되는 것으로 답안을 쓰려면 만만치 않은 추상화 능력이 요구됩니다. 4개의 제시문은 모두 길지는 않지만, 난도가 꽤 높습니다. 최근 들어 각 대학에서는 난도가 낮은 대신 꼼꼼히 읽어보면 많은 정보를 캐낼 수 있는 제시문을 출제하고 있습니다. 제시문의 주제로는 현실 사회 문제와 관련된 내용을 즐겨 출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서강대 정시논술 문제는 최근 각 대학의 출제 경향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가)에서 예수를 만나려 했던 네 번째 동방박사 타오르는 곤경에 빠진 타인을 대신해 소금 광산에서 죄수로 일합니다. 30년 넘게 노역을 치르고 있던 어느 날, 신입 죄수 데마스로부터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은 배부를 것이다’라는 예수의 설교 내용을 전해 듣습니다. 그는 그 말을 들으며 눈물을 흘립니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타인을 위해 소금 광산에서 노역에 시달리는 타오르 자신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말씀은 타오르의 노역이 헛된 것이 아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었습니다. 데마스와 타오르에게는 이러한 예수의 말씀이 다른 의미, 다른 무게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곪은 눈꺼풀에서 흘러내린 한 방울의 눈물을 30년 만에 처음 맛보는 단물로 느낀 타오르를 아마 데마스는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결국 (가)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체험입니다. 타오르의 눈물은 타오르의 30년 이상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타오르의 체험은 주관적인 것이지요. 주관적이라는 면에서 (가)는 (라)와 연관이 됩니다.

(라)는 배움에 대한 글입니다. 그런데 이 배움, 즉, ‘지성의 진리’ 혹은 ‘객관적인 내용’은 ‘추상적인 가능성’만을 줄 뿐이며, 우리는 ‘다른 길’, 즉 ‘자기의 시간’을 통해 배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배움이란 ‘그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고 협력조차 제공할 수 없는’ 각자의 주관적 행위라는 것이지요. 사람들은 똑같은 예수의 말을 듣고서도 저마다 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다른 깨달음을 얻어갑니다. 이는 각자의 시간, 다시 말해 각자의 삶의 경험과 이해의 차이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반면, (나)와 (다)는 객관적인 인식을 다루고 있습니다. (다)에서는 참과 거짓을 가려내는 ‘이성’은 누구나 다 갖고 있다고 합니다. (나)에서는 이런 지성을 통해 누구나 객관적으로도 충분한 견해인 지식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합니다. ‘철학자만이 그 지식을 밝혀낼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지성이란 자연이 ‘모든 이에게 차별 없이 부여’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관적인 인식과 객관적인 인식은 이렇게 대립되는 과정입니다. 그러나 객관적인 인식이 없다면 주관적인 인식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가), (라)에서 주관적 인식인 깨달음은 나중에 옵니다. (가)에서는 30년 이상의 노동을 한 뒤에, (라)에서는 자기의 시간을 잃어간 뒤에 오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시간이 흐르고 나서 자신의 경험을 되돌아보고 그 시간의 의미에 대해 사유하며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이성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깨달음과 배움은 주관적 과정을 통해 도달하는 것이지만, 이성이 없다면 체험은 깨달음으로 승화될 수 없습니다. 체험이 소멸되는 경험이 아닌 깨달음으로 승화되는 것은 이성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반면, 주관적 깨달음이 없는 이성은 무의미한 것입니다. (가)의 타오르가 30년 이상의 고된 삶이 아닌, 객관적인 지성으로 예수의 말씀에 접근했다면 그것은 단지 하나의 소중한 지식으로만 기억될 것입니다. 그러나 타오르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예수의 말씀이 갖고 있는 본질을 깨닫습니다. 이성은 깨달음을 위한 전제이지만, 그것이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주관적 과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관적 인식과 객관적 인식은 대립되는 것 같아 보이지만 양립이 가능합니다.

이현 스카이에듀 논술원 대표

※ 2008 대입논술 해설 easynonsul.com 및 스카이에듀 홈페이지(www.skyedu.com)에 풀이 및 동영상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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