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시문 <가>와 <나>, <다>에서 피력된 욕망에 대한 견해를 비교하고, <마>, <바>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취하면서 <라>의 관점을 바탕으로 참된 행복에 이를 수 있는 욕망관에 대하여 모든 제시문들을 참고하여 자신의 생각을 논술하시오 (1600자±100자) ※제시문은 이지논술 사이트에 있습니다.
■학생글 - 이건혁·제주제일고등학교 3학년
욕망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역사를 발전시키는 주 원동력인 동시에 인류역사에 큰 오점을 남긴 원흉이기도 했다. ①욕망에 대한 입장은 시대마다 다르게 평가되었으나 욕망이 어떻게 사용되는 데에 따라 그 결과 또한 달라지는 양날의 칼로 작용했다는 점에서 욕망 자체는 중립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제시문 <가>는 욕망이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거나 누릴 수 없는 것에 대한 동경을, 제시문 <나>는 욕망의 억압 및 포기가 사회발전과 인류의 생계유지를 위한 필연적 현상으로, 제시문 <다>는 욕망의 생산적 기능을 가진 긍정적 요소로 본다. ②제시문 <가>, <나>, <다>는 모두 욕망의 성질을 말하고 있으나 제시문 <가>와 <다>에서는 모두 <가>에서 말하는 아름다움과 선을 이루기 위한 계획을 세우게 하는 것과, <다>에서 말하는 상상력을 발휘하여 여러 생산적 기능을 하게 하는 데 욕구가 긍정적 기능을 한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가>에서는 자기결여가 욕구의 원인인 데 반해 <다>는 삶의 보존과 향상을 위해 환경의 여러 요소의 연결이 욕망의 원인이 되고 있다. ③제시문 <가>와 <다>에 비해 <나>는 문명의 시작과 발전이 욕망을 억압하면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부정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제시문 <가>와 <다>의 욕망의 생산적 기능과는 반대로, 제시문 <나>에서는 문명의 발달을 저해하고 생계유지에 불필요한 요소로 인식하고 이를 극복하고자 인간은 일시적 욕구를 억제하고 유보함으로써 문명을 진보시킨다고 보고 있다.
제시문 <마>는 소유지향이 타인을 배제하는 이기주의에 빠지기 쉽고 사물과의 관계가 궁극적으로 사물과 인간이 서로 소유하고 소유되는 존재가 된다고 보는 입장이다. 이는 현대사회의 인간 소외 현상과 유사하며 이는 현대사회에 큰 문제가 되고 있다. ④하지만, 제시문 <마>에서는 소유지향을 통한 자원의 효율적 활용과 통신기술 발달로 말미암아 타인과의 교류 증가와 같은 소유를 통한 타인과의 관계 증진과 같은 긍정적 기능을 배제하고 있다.
제시문 <바>에서는 소비의 시대가 개인적 욕망을 지배함으로써 생기는 부정적 기능을 말하고 있다. 이때 욕망은 소비를 위해 이용되는 존재이다. ⑤하지만, 소비의 시대에서 욕망을 이용하는 것은 소비자가 원하는 것을 빨리 구할 수 있게 하는 긍정적 기능도 하고 있다. 이는 수요 정보를 파악하고 이를 생산하는 시장의 기본적 기능에 해당한다. 이는 이 글의 논리가 한 방향으로 치우쳤음을 보여 준다.
욕망은 그 감정의 쓰임에 따라 얼마든지 생산적이고 윤리적인 행위를 도출해 낼 수도 있다.⑥제시문 <라>에서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삶의 목적은 다르지만 모두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일생을 살며, 그중에는 자신의 이익을 희생하고 남을 도움으로써 삶의 만족을 얻는 사람들도 있다. 이 경우 자신의 사익과 공익이 일치하는 이상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⑦하지만,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자신의 만족을 추구하는 것만으로도 욕망을 통해 얼마든지 바람직한 행복추구를 실현할 수 있다.
⑧제시문 <가>와 <다>는 욕구충족을 위해 선과 생산을 추구하여 자신의 행복과 사회 공익을 동시에 충족시킬 수 있음을 보여 주고 있고, 제시문 <사>를 통해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만족을 얼마든지 추구할 수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결국, 욕망을 통해 참된 행복에 이르는 길은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 자신의 욕구를 최대한 충족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첨삭지도
이번 논제의 쓸 거리는 궁극적으로 하나다. 참된 행복에 이르는 욕망관에 대해 논술하는 것이다. 하지만 세부적 논제 요구조건은 세 개다. 이렇게 논제를 복잡하게 만드는 이유는 수험생이 논제 파악을 제대로 하면서 문제를 창의적으로 풀어 나가는지, 즉 ‘창의적 문제해결 능력’을 보려는 때문이다. 논제 파악이 논술의 첫 단추이고 이를 통해 수험생의 창의성을 측정하고 변별력을 갖는 게 ‘대한민국 논술 타입’이다.
이건혁 학생은 세 개의 쓸 거리를 본론에 순차적으로 썼다. 논제 요구조건을 만족했다. 하지만 제시문 분석에 문제가 있다. ③에서 <가>와 <다>가 욕망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나>는 부정적으로 본다고 했다. 하지만 <가>는 소크라테스의 입을 통해 에로스, 즉 욕망은 ‘결핍으로 욕망하나 선과 아름다움을 결여’한다고 전한다. 욕망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다. 하지만 ⑧에서 욕망은 자신에게 결핍된 선과 아름다움을 충족하려고 역설적으로 자신의 행복과 사회 공익을 동시에 실현할 수 있다는 지적은 통찰력이 깃든 창의적 안목이다. 그리고 세 번째 쓸 거리인 ⑥에서 개인들은 서로 ‘다른’ 존재이므로 참된 행복에 이르는 길은 서로가 ‘다름’을 인정하는 바탕 아래, ‘다르게’ 욕망하는 데서 기본적으로 출발하는 것이라는 지적은 출제 의도에 맞춰 제시문 분석을 잘한 예다.
두 번째 쓸 거리인 ④와 ⑤에서도 논제 요구대로 <마>와 <바>에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하지만 ④처럼 소유물의 기술적 진보가 인간관계의 질을 담보한다는 논리는 억측이다. 가령 폐쇄회로(CC)TV가 사생활 감시도구이고 휴대전화는 개목걸이라는 비판이 있지 않은가. 물론 ⑤에서 소비욕망이 우물물처럼 ‘생산-소비’시장을 원활하게 돌아가게 한다는 비판은 타당하다. 그렇지만 <바>는 그런 고전주의 경제학을 넘어, 소비의 정치경제학 측면에서 소비욕망의 대상이 단순히 물적인 것들을 넘어 기호와 이미지 심지어 인간의 육체와 인간관계까지 확대돼 상품 논리의 과잉현상이 일고 있다는 글이다. 곧 모든 것이 상품 논리의 종속개념으로 변한 세태를 지적하고 있다.
전체 글의 논지는 필자가 도입부에서 욕망은 가치중립적이라고 단호하게 선언했듯이, <다>의 입장에서 욕망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 그러니까 고전적 자유주의가 말하는 개인주의 욕망관이 행복이라는 논지다. 다시 말해 존 스튜어트 밀의 공리주의 입장에서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자유롭게 개인주의적 욕망을 추구하는 것이 행복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 논제의 출제 의도는 ‘논제 그 자체에서' 드러나듯, 소비의 시대에 욕망의 노예로 전락한 우리의 소유 지향의 삶을 비판적으로 서술하라는 것이다. <마>와 <바>는 욕망의 현 세태를 공통적으로 꼬집고 있는데, 이걸 통해 우리가 현재 욕망하고 있는 방식이 ‘다른’ 것을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이’ 가지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는 걸 학생들이 읽어 내길 바랐던 것이다. <사> 저자들의 글을 통해서도 학생들이 <마>와 <바>를 비판적으로 독해해 성찰과 반성이 있는 욕망이 참된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다는 걸 이미 논제가 암시하고 있다는 걸 읽어 내길 바랐다는 뜻이다. 다시 정리하자면 건혁 학생은 밀의 공리주의에서 개인주의(이기주의가 아님)의 얼굴을 바라보았지만 동전의 양면처럼 또 다른 얼굴인 ‘공동체주의’는 읽어 내지 못한 것이다. 우리가 욕망 추구를 통해 그 무언가를 얻었는데, 과연 ‘무엇을’ ‘누구를’ 위한 것인가, 즉 욕망의 가치론이 빠져 있는 게 글의 맛과 설득력을 떨어뜨린 셈이다.
원고지 8매(1600자)가량의 글인데 원래 단락이 4개뿐이었다. 구성력의 결함이다. 중심내용의 전개에 따라 일곱 단락으로 나눴다. ①과 ②는 어색한 문장이므로 “욕망에 대한 입장은 시대마다 달랐고 각기 다른 욕망관에 따라 삶의 모습 또한 달라진다는 면에서 욕망 자체는 가치중립적이다.”, “<가>, <나>, <다>는 모두 욕망의 성질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가>와 <다>는 욕망을 긍정적으로 보고 <나>는 부정적으로 본다.”로 각각 명쾌하게 써야 논술답다. ⑦은 문맥상 ‘그래서’ 혹은 ‘고로’가 맞다.
제시문 분석
<가> 플라톤의 ‘향연’ 이후 진리에 대한 사랑과 이성을 강조하는 서양철학이 욕망을 부정적 시선으로 본다는 걸 감지할 수 있는 글이다. 즉 욕망은 결핍의 다른 이름이다. 인간은 완전하지 않고 무언가 부족하기 때문에 그것을 채우기 위해 무언가를 끊임없이 욕망한다. 그 결핍이 끝이 없다는 측면에서도 부정적이다.
<나>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는 욕망을 부정적으로 바라본다. 글 <가>의 ‘부정적 욕망’이 더 크게 확대된 예다. 프로이트에게 문명 창조(현실원칙)는 인간이 ‘본능적 욕구(쾌락원칙)’를 억압한 결과다. 목적은 생존을 위해서인데, 문명 진보를 위해선 욕망 만족을 포기하거나 유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결핍된 욕망을 채우기 위해 쾌락원칙에 따라 무절제하면 곧 서로의 이해관계와 충돌할 수밖에 없고 개인과 사회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래서 ‘인간의 역사=욕망의 억압사’이다.
<다>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에 따르면 욕망은 결여로부터 시작되지 않고 ‘연결’로부터 시작된다. 자기보존욕망은 다른 욕망들과 연결돼 개인의 힘을 향상시키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공동체와 사회가 형성된다. 그러므로 욕망은 억압의 대상이 아니라 표현의 대상이다.
<라> 개인들은 서로 ‘다른’ 존재라는 게 핵심 논점이다. 삶의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수많은 선택이 반드시 자신의 삶의 목적과 일치하지 않는다. 인간의 실존이다. 그것은 사회적 배경에 따른 가치관의 차이, 개인적·사회적 상황, 타고난 능력이나 교육 등 복합적인 요인의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인간은 서로 다르기에 서로 다른 욕망을 하므로 인간의 행복 척도는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마> <바> 현 세태인 소유 지향적 태도와 소비 지향적 태도를 각각 분석하고 있다. <마>에서 에리히 프롬은 삶을 두 가지 방식으로 나눠 설명한다. 소유의 삶과 존재의 삶이다. 소유의 삶은 ‘내 것’을 위해 타인을 배제하는 게 바로 자아실현이다. ‘인간’인 나와 ‘물질’인 나의 소유물 사이도 살아 있는 관계가 아니라 둘 다 ‘사물’일 뿐이다. 프랑스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는 ‘소비의 사회’에서 상품논리가 노동과정, 문화, 섹슈얼리티, 인간관계, 심지어 환상과 개인적 욕망까지도 지배하고 있다고 한다.
<사> 헬렌 니어링과 스코트 니어링의 삶은 마르크스가 공산당선언에서 유토피아적인 삶을 표현한 대목을 떠오르게 한다. 하루를 오전과 오후 둘로 나누어 빵을 벌기 위한 노동은 하루에 반나절만 하고 나머지 시간은 온전히 자기 자신을 위해 쓴다. 하지만 우리는 어느새 물질의 노예가 되어 자연친화적이고 존재충족적인 삶을 잃어버렸다. 단순하면서 충족된 삶. 에리히 프롬식으로 말하자면 ‘소유의 삶’이 아니라 ‘존재의 삶’을 그들은 욕망한 것이다.
※ 다음 주 논제와 관련, ‘해바라기’(시몬 비젠탈, 박중서 옮김, 뜨인돌)를 미리 읽으면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노만수 학림논술연구소 연구실장, 서울디지털대 문창과 교수
■다음 주 논제
다음 글들은 국가범죄나 전쟁에 대한 사후처리를 ‘용서와 화해 그리고 정의’ 차원에서 다루고 있다. <가>의 질문에 대한 대답의 예인 <나>와 <다>의 차이점을 설명한 뒤, 자신의 대답을 <라>와 <바>와 같은 현실의 구체적 사례를 적용해서 논술하시오.(1600자 ±100)
<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집단수용소에 갇혀 있던 시몬 비젠탈은 어느 날 한 간호사의 손에 이끌려 죽어가는 어느 SS(나치스 친위대)대원의 병상 앞에 서게 된다. 젊은 SS대원은 난생 처음 보는 비젠탈에게 과거 자신이 유대인에게 저지른 잔인무도한 유대인 학살을 낱낱이 털어놓으며 참회한다.
“저는 여기 남아서 이렇게 죄의식에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당신이 누구인지는 모릅니다. 그저 당신이 유대인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니까요. 저는 마음 편히 죽고 싶습니다. 그러니 제발.”
비젠탈은 순간 당혹감에 휩싸인다. 그를 동정할 것인가. 심판할 것인가, 침묵할 것인가, 진실을 말할 것인가 하는 양자택일의 상황에서 비젠탈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자리를 떠난다. 나치에게 89명이나 되는 일가친척을 잃고 아내와 단둘이 살아남았던 비젠탈은 종전 후 유대역사기록센터를 설립해 1100명의 나치 범죄자를 색출한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지 몇 년이 흐른 뒤에도 비젠탈의 마음속에는 한 가지 질문이 떠나지 않고 있었다. 여기 죽어 가는 사람이 있는데, 나는 그의 마지막 소원조차 들어 주지 못했다는 것. ‘과연 내가 옳은 일을 한 것일까? 그 자리에서 내가 어떻게 했어야 하는 걸까?’ 이 문제의 핵심은 물론 용서에 대한 질문이라 할 수 있다. 망각이란 오직 시간만이 해결해 줄 수 있는 문제지만, 용서는 오히려 의지의 문제라고 할 수 있고, 또한 그러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바로 고난을 당한 장본인뿐이기 때문이다. 비젠탈은 이 슬프고도 비극적인 이야기를 읽은 여러분에게 자신과 입장을 바꾸어,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 있게 한다.
“과연 당신이라면 어떻게 했을 것인가?” [시몬 비젠탈 ‘해바라기’ 설명글 ]
<나> 나는 어느 누군가에게, 그리고 인류 전체에게 큰 죄를 지은 사람이라도 우리가 기꺼이 용서해야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지은 죄까지 잊어버려야 한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가 지은 죄를 인식하고 또 기억함으로써, 앞으로는 또다시 그런 죄가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믿는다.(…)여기서 문득 나는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몇 년 전에 무려 18년 동안이나 중국의 감옥에 수감된 어느 티베트인 스님이 가까스로 인도를 탈출한 후 나를 만나러 왔다. 나는 티베트에 있을 때부터 그를 알았는데, 1959년 이후에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그날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는 문득 그에게 감옥에 있을 때 가장 큰 걱정이나 위험이 무엇이었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나는 그의 대답을 듣고 깜짝 놀랐다. 너무 특이하고 감격적이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나는 그가 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을까 예상했는데, 그는 단지 자기가 감옥에 있는 동안 중국인에 대한 동정심을 잃게 되지 않을까, 그것만을 걱정했다고 대답한 것이다. [달라이 라마, ‘시몬 비젠탈의 질문에 대한 대답 글’]
<다> 제가 그를 유치하다고 하는 까닭은, 그의 모습이 마치 누군가의 도움을 바라며 징징거리는 어린아이와 같기 때문입니다. 나치의 선전에 단련된 그의 머릿속에서 ‘유대인’은 그저 열등한 존재였지요. 절반은 악마고, 절반은 성자라서, 결국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존재 말입니다. 연합국 측과의 비밀협상에서 국제 유대인 협회가 혹시 독일 편을 들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히틀러가 한때나마 ‘라거’(독일어로 ‘수용소’란 뜻)에서의 학살을 중단하도록 지시한 것도 결국 이와 같은 맥락에서 한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리고 제가 그를 뻔뻔스럽다고 하는 까닭은, 그 나치가 다시 한 번 유대인을 도구로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요구로 인해 그 죄수(시몬 비젠탈)가 어떤 위험과 충격에 노출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서 말입니다.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면, 그의 행동은 그야말로 이기주의로 가득 차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다만 자신의 고민을 단지 다른 누군가에게 전가하고 싶어 했기 때문입니다. [프리모 레비·이탈리아 작가]
<라> 모리스 파퐁은 나치의 꼭두각시 정권이었던 비시 정권하에서 보르도 지역의 치안 부책임자였다. 그는 1942년에서부터 1944년까지 1590명의 유대인을 체포하여 죽음의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보냈다. 희생자 유족들의 고발로 모리스 파퐁은 1983년에 정식 기소됐다. 그러나 모리스 파퐁을 법정에 세우기까지는 16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왜냐하면 한동안 비시 정권하에 있었던 관리들의 수동적 행위를 단죄할 수 있는가의 논란이 야기됐기 때문이다. 파퐁 자신도 “공복으로서 거역할 수 없는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항변하였다. 또한 파퐁의 반인륜적 범죄에 대한 사실 확인이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드골 정권 등 전후의 정권에 대한 평가와 역사 해석 문제와 맞물려 여론이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다. (…) 1997년 보르도 항소법원이 모리스 파퐁을 재판에 회부했고, 6개월 후에 그는 징역 10년형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이에 불복해 항소했고, 그 결과가 나오기 직전 외국으로 망명을 시도했지만 결국 스위스의 스티 휴양지 그스타트에서 체포되어 프랑스로 압송되었다. 이렇게 하여 1999년 당시 89세인 모리스 파퐁은 감옥에서 생을 마쳐야 할지도 모르는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미셸 깽, ‘처절한 정원’]
<마> 피고인이 수천 명을 태워 아우슈비츠 또는 다른 학살 장소들로 보낸 모든 기차가 피고인이 직접 의도적으로 수천 명의 학살에 참가했다는 것을 증명해 줍니다. 이 학살에 대한 피고인의 법적, 도덕적인 책임은, 사람들을 직접 가스실로 던진 자들의 책임과 비교하여 결코 적다고 할 수 없습니다. [‘아이히만 재판판결문’에서]
<바> 일제 말엽에 한국의 명사들이 학도들에게 지원병을 장려하는 망동을 하지 않았나? 그 사람이 어떻게 그랬을까 싶은 사람들까지도 그랬었단 말이야. 그 사람들의 생각은 이랬다는 거야.
일본을 넘어뜨리고 독립하기는 인제 틀렸다, 일본은 너무 강해졌다, 이런 현실에서 조선 사람들에게 반항을 설교한다는 것은 피해만 크고 이득은 적다, 거꾸로 우리가 그들에게 협력함으로써 우리들의 몫을 늘리자, 이 전쟁이 끝났을 때 우리는 백의동포의 아들들이 흘려준 피의 값을 받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해서 조금씩 자치를 실현해 가자, 백만 학도여, 그대들은 역사 앞에 바쳐지는 순결한 어린 양이다, 겨레를 위해서 죽으라, 이것이 그분들의 논리였다는 거야.
국제정세에 어두웠던 것은 용서해 준다고 치더라도 이 얼마나 비열한 노예의 논리냐 말이야. 민족을 향해서 발언하는 사람들의 이 어처구니없는 헛소리가 당시의 청년들에게 얼마나 해독을 끼쳤을까? 이 논리를 그대로 좇는다면, 우리는 한국말 대신에 일본말을 더욱 열심히 배워야 하고, 그들의 생활을 본받아서 끝내는 삼천만 명이 모조리 뼛속까지 일본사람이 돼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지 않겠나. 차라리 입을 다물면 모르되 순진한 정신을 그르치는 이런 말을 뇌까린 사람들이 이른바 지도자들이었으니, 우리는 참 복도 없는 민족이야. 처녀가 애를 배도 할 말은 있다지만 애 배지 않은 것만큼은 못할 게 아닌가? 독립선언문을 기초한 사람이 침략자들이 세운 대학에서 강의를 하였으니 슬픈 일이었어. 이런 잘못을 다시 저질러서는 안 돼. 정치의 세계에서는 당분간 이빨에는 이빨로 대한다는 법칙이 있을 뿐이야. 그러지 않겠거든 침묵하든지.
노만수 학림논술연구소 연구실장, 서울디지털대 문창과 초빙교수
○이 사이트로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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